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지나가는 인연이 많은 편이다. 기억과 함께 사라진 사람도 많고, 기억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도 많다. 어제는 “옛날 제자가 맡겨 두고 갔어요”라는 말과 함께 두 권의 책을 건네받았다. 독립출판으로 펴낸 여행 사진집 두 권에 내가 기억하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06년에 나와 함께 시공부를 했던 아이였다. 나눈 이야기도 몇 마디 되지 않았던 사이였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 아이의 목소리며 말의 속도며 말하는 입 모양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기억하던 그 아이와 그 아이가 펴낸 두 권의 책은 느낌이 거의 똑같았다. 시를 무척 그윽하게 써서, 나는 그 아이가 시인이 될 거라 믿었다. 시인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던 것도 같다. 지나치게 말수가 적고, 조금이라도 자신을 드러낼 줄 모르며, 있는 듯 없는 듯 한 그 아이의 내향성을 걱정했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자, 내 걱정 따위는 여느 어른들의 틀에 박힌 염려와 똑같았음을 알았다. 부끄러워야 마땅한데 마냥 기뻤다. 10년 동안 그 아이가 자신을 잘 지키고 살아왔다는 게 기뻤고, 내향적인 그대로 이렇게나 멋지게 자신을 드러내어 기뻤다.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드러내는 인생은 얼마든지 새롭게 발명될 수 있다는 걸 목격할 수 있어서 그게 마냥 기뻤다. 기억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이었지만, 이런 간접적인 뒷모습으로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덤으로 기뻤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