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갚아야 할 의무는, 냉정한 경제이론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빚은 반드시 갚는다는 게 법칙일 경우 금융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은행이 원금과 이자를 늘 돌려받는다는 전제로 대출 영업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나, 명백히 갚을 의사가 없는 이에게조차 돈을 빌려주는 비상식적 행위가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은 종교적 또는 도덕적 명제이다. 인류학자들의 탐구 결과에 따르면, 빚의 기원은 돈(화폐)의 그것보다 앞서 있다. 실제로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 성전인 <베다>해설서에는 빚을 인간의 원죄와 동일시하는 표현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가령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체가 하나의 빚이며, 목숨이나 제물을 바쳐야 빚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식이다.
원죄적 빚이 세속의 빚으로 점차 바뀌는 계기는 돈의 출현이다. 도덕적 의무와 채무가 다른 점은 양적 측정 가능성에 있다. 측정 수단이 바로 돈이다. 부채의 도덕적 의무를 수치로 환원하는 데 돈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여기서 국가는 빚의 해결을 강제하는 권력자가 된다. 부채를 잘게 쪼개는 방법을 만드는가 하면 상환 의무가 원활히 이행되도록 법적 조건들을 정한다. 국가는 채무자들의 ‘잠재적 범죄’를 경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수 국민의 채무자화를 통해 버젓이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권력도 있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9월 말 현재 우리나라 가계 빚(가계신용) 규모가 1166조원에 이르렀다. 2013년 1000조원을 돌파하더니 2년도 채 안 돼 1200조원에 육박했다. 이명박근혜 정부 7년 동안 가계 빚은 420조원(63.1%)이나 늘어, 가계총처분가능소득(239조원, 39.9%) 증가세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국민 파탄, 금융 재앙으로의 질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 누구의 원죄인가.
박순빈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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