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차별을 이긴 혁신과 연대 / 강정수

등록 2015-12-02 18:41

게롤드는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경영·경제학과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다. 그의 월급은 독일 평균 임금 대비 한참 낮다. 늘 빵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지만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커피를 사주는 등 넉넉하다. 아시아 출신 학생 여럿의 도서관 생활을 뒷바라지해왔다. 대출 연장 기간을 따로 알려주고, 논문 주제 관련 서적이 도서관에 입고되면 나를 위해 먼저 예약해두곤 했다. 리포트나 논문 교정을 돕기도 했다.

인터넷 기반 전산화가 확산되면서 도서관에도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베를린 자유대학교는 총 7명의 경영·경제학과 도서관 직원 중 2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게롤드는 그 2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얼마 후 도서관 사서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해고 통보를 받지 않은 5명의 사서는 동료 2명의 해고를 막기 위해 자신들의 월급 삭감을 결정했다. 동료 2명의 월급을 만들기 위해서다. 사쪽인 대학교 행정 당국에는 이들 2명의 사회보장비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게롤드를 만나 정말 훌륭한 결정이라며 감동을 전했다. 게롤드는 당연한 일을 했다면서 “생활이 빠듯했는데 이제 휴가 때도 베를린에 머물러야겠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정년까지 남은 10년을 더 적은 월급으로 살아가야 했다. 나는 그때 연대의 가치를 배웠다. 이른바 산업 합리화와 구조조정에 임하는 힘없고 연약한 노동자의 연대가 무엇인지 배웠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비정규직이 도미노 효과를 보이며 급속하게 늘어났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도미노 패는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한편, 도미노 블록을 곳곳에서 쓰러뜨리고 있는 사용자와 신자유주의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곤 한다. 일부 정규직의 경우 급여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동일 노동을 하는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동료가 설·추석 선물에서도 차별받는 것을 당연시한다. 심지어 체육대회 때 정규직,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의 도시락이 다른 경우도 있다. 어디 차별이 이뿐인가. 언론사에는 기자와 비기자의 차별이 있고, 방송사에는 공채와 계약직의 차별이 있다. 지성과 합리성의 요람이라 주장하는 대학교는 차별의 온실이다. 공공성을 강조하는 공기업의 업무를 지탱하는 힘은 하청업체와 파견 노동자다.

차별과 혁신은 충돌한다. 혁신은 크고 작은 권력 이동을 동반한다. 혁신을 추진하는 새로운 집단이 성장하면, 이들은 전통 세력을 대체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은 경제를 주도하는 기업의 교체를 의미한다. 기업 내부로 볼 때에도 혁신을 위한 권력투쟁은 피할 수 없다. 전통 지배 기업과 기업 내부 지배 세력의 차별적 특권을 제한하지 않으면 혁신은 불가능하다. 혁신 세력이 자라날 동기와 자양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연대 없이 진보의 미래는 없다. 차별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차별받는 이와 모진 차별에서 아직은 벗어나 있는 노동자 사이의 연대가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가 몰락한 이유를 정권과 1%의 가진 자에게서만 찾을 때, 한국 사회의 진보는 없다. 또한 도미노 효과는 마지막 도미노 패가 넘어져야 끝날 것이다.

강정수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
강정수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
게롤드를 떠올릴 때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허리 디스크로 통증을 호소하면서도, 더듬거리는 독일어로 말을 거는 아시아 학생을 늘 웃는 얼굴로 맞이했던 게롤드는 내게 독일 사회를 부럽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튼실한 독일의 실업보험과 연금제도는 게롤드와 같은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쉬운 해고’를 비판하기에 앞서 쓰러진 도미노 패를 일으켜 세우는 연대의 손길이, 혁신 세력에게 길을 터주는 결단이 한국 사회에 절실하다.

강정수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1.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2.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3.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4.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5.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