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셋 중 하나 / 이라영

등록 2015-12-09 19:22

작년 6월 워싱턴에서 <1 in 3>라는 제목으로 세계은행이 기획한 전시가 있었다. 저 숫자를 보면서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참여 작가는 모두 여성이다. 평균적으로 전세계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일생 동안 적어도 한 번은 물리적 폭력이나 강간의 피해자가 되는 현실을 반영한 제목이다. 셋 중에 한 명, 이 숫자는 잘 변하지 않는다. 세계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도 그 숫자는 마찬가지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의 사진작가 하니파 알리자다의 작품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가장 ‘좋았다’. 두 여성이 마주 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이 한 여성의 입을 막고 있으며, 또 다른 손이 마주 보는 다른 여성의 눈을 가리고 있다. 마주 앉았으나 볼 수 없으며, 보고 있으나 말할 수 없는 ‘우리’ 사이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와 무관하다. 이들이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듣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들을 지배하는 ‘목소리’를 상상할 수 있다. 전시 기획의 일환으로 마련된 토론회에서 ‘날리우드’(나이지리아 영화)의 스타 스텔라 다마서스는 ‘침묵과의 싸움’에 대해 가장 열렬히 말했다. 폭력 피해자의 침묵은 물론이고 그 폭력을 감싸주는 주변의 침묵과 무관심의 보호막은 거대한 제도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남성)과 인간(남성) 사이의 폭력은 보편적으로 그냥 폭력이다. 하지만 대부분 여성을 향한 ‘인간’의 폭력은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이라는 별도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가정 문제와 연인 문제라는 사적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다. 폭력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 체계는 이 사적 영역 앞에서, 정확히는 ‘여성이 겪는 문제’ 앞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창으로 여자를 위협한다는 어원을 지닌 ‘위엄 위(威)’처럼, 여성을 짓눌러야 이룰 수 있는 위엄이 남성성을 구성하고 있기에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을 남녀 ‘관계’의 일환으로 여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비대칭적 구조이고 법, 문화, 논리, 심지어 윤리이며 인간의 도리다.

연인 관계에 있는 여성을 4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폭행한 남성을 둘러싼 사회의 시각을 보면 이 구조가 얼마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지 알 수 있다. 이 사회의 ‘정서’는 폭행 가해자인 남성이 의사가 되지 못할까 봐 안타까워한다. 2명의 여성을 폭행한 이에게 벌금형만 내리는 법의 심판은 이러한 집단의 정서를 합리화하는 로고스로 작동한다. 피해자가 법 밖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여론이 시끄러워진 다음에야 가해자를 제적하는 학교를 보면 역시 시끄럽게 굴어야 겨우 듣는 척이라도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정에서, 귀가 중에, 애인과 이별할 때, 마트에서, 직장에서,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공포는 여성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여성들이 갈수록 이 일상의 공포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하자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지 말라며 불쾌해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잠재적 피해자’로 조심하며 사는 습관은 당연한가. 공포의 발생 맥락과 사회가 약자의 공포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지배하는지에 대해 무지하면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쓸모없는 분노만 늘어난다. 여성에게 조심할 것을 강요하는 습관이 바로 공포의 일상적 활용이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셋 중의 한 명’이 내가 아니라고 보장할 수 없다. “여성은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버지니아 울프)을 했다. 이 마력의 거울 노릇은 집어치우고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틀을 깨는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깨지 않으면 틀은 계속 유지된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1.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2.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3.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4.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5.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