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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병신년(丙申年)의 신년사 / 손아람

등록 2015-12-16 20:30수정 2015-12-16 20:48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여는 기반을 다져 가겠습니다.” 2015년 1월1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였다. 올해 국민소득은 6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고, 가계 부채가 국민소득을 앞질러 3만달러를 돌파했다. 청년들은 조국을 ‘헬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국가 경제를 살리는 데 있어 전제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2014년 1월1일,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였다. 몇달 뒤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고 304명의 목숨이 희생됐다. ‘세월호 경기 침체’라는 섬뜩한 표현이 출현했다. 정말이었다. 인간의 목숨. ‘국가 경제를 살리는 데 있어 전제조건’.

“국정의 중심을 민생과 국민 대통합, 약속 실천에 두고 국민 모두가 행복한 100퍼센트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저의 국정운영 철학입니다.” 2013년 1월1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신년사였다. 그해 여름 반으로 쪼개진 광장은 국정원 선거개입을 규탄하는 촛불과 촛불을 규탄하는 촛불로 넘실거렸다. ‘국민행복 10대 공약’으로 명명된 대통령 후보 시절 약속은 여전히 실천되지 않고 있다. 말과 가능성 사이가 너무 멀어서 굳이 이행을 요구하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1)가계부채는 늘어났고 (2)무상보육 예산은 0원으로 편성되었으며 (3)반값 등록금은 증발했고 (4)저소득층에 부담을 지우는 역진적 건강보험 체계는 여전하며 (5)청년실업은 회복 기미가 없고 (6)해고 요건 강화 제도는커녕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노동개혁안이 국회로 넘어갔고 (7)비정규직 수와 최저임금은 요지부동이고 (8)국민은 재난으로부터 보호되지 않았고 (9)대기업 과세 법안은 무산됐고 (10)대탕평 인사의 결과로 정부 요직을 경상도 출신이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공약의 완벽한 반(反)실행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캠프 본부장이었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작년 초 한 강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거짓말을 잘 못해서 참모들이 써준 공약을 그대로 읽었고, 국민은 거기 속아서 표를 찍었다고 고백했다. 그의 거리낌없는 농담에서는 부끄러움보다 자신감이 읽혔다. 강연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땅에 달라붙는 듯한 저음으로 호방하게 껄껄거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사람들은 웃지 않았고, 발끈 화를 냈다. 다 지나간 일이다. 사실에 성을 부려야지 실패한 유머에 치를 떨어봐야 덧없다.

병신년의 새해가 돌아온다. 첫날을 여는 첫 문장은 언제나 대통령 신년사다. 대통령은 다시 한 번 참모들이 써준 신년사를 읽게 될 것이다. “거짓말을 잘 못해서”는 아니다. 원래 참모들이 하는 게 그런 일이다. 지금쯤이면 참모들은 어휘와 어미를 선정하느라 진지하게 머리를 쥐어짜고 바쁜 토론을 벌이는 중일 것이다. 나는 세상에 떨어진 언어를 신문 스크랩하듯이 모아서 지나간 신년사 위에 붙여두겠지만, 정작 무엇을 듣게 될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시간은 말을 걸러낸다. 나는 한 해가 다 지나간 뒤에야 그 말들을 다시 꺼내볼 계획이다. 고생할 참모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신년사가 세련된 만우절 농담이나 다름없는 것이라면 작가인 내가 훨씬 더 잘 쓸 수 있을 테니까.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작별의 인사를 나누세요. 대낮의 별처럼 빛나는 저 하늘의 소행성이 보이십니까? 어머니의 품과 같이 지구를 보호해주던 목성의 중력도 저 궤도만큼은 바꿔놓지 못했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운명입니다. 애석하지만, 올해의 끝과 함께 우리는 이렇게 멸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달성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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