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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금수레와 공정한 경쟁 / 홍대선

등록 2015-12-20 18:58

아산 정주영을 처음 본 건 수습기자로 뛰어다니던 1994년 이른 봄이었다. 갑자기 그의 건강 이상설이 돌았고 취재기자들은 서울 인왕산 자락의 청운동 자택과 현대그룹 본사가 있던 계동을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나서야 그를 다시 만났다. 비록 사진 속이었지만 빙긋이 웃고 있는 얼굴 옆에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문구가 또렷했다.

이제 와서 새삼 정주영을 떠올리는 것은 한국 경제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그보다 창업세대가 보여줬던 불굴의 개척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창업세대는 흔히 말하듯 ‘맨땅에 헤딩하며’ 지금의 성장 기반을 일궜다. 정경유착의 그림자가 있음에도 그들의 도전정신을 평가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재벌경영은 이제 3세, 4세까지 확장됐다. 경영 능력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이 지배주주로 있는 회사는 1천곳이 넘는다. 경제위기설에 내년이 어떻게 될지 아슬아슬한 판에 재벌가 자녀들은 올해도 초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그들 회사에는 어김없이 계열사 일감이 몰렸다. 이것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금수레’를 끌고 다니며 부를 쓸어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일감 몰아주기는 기업가 정신과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이슈다. 기업인들이 비즈니스 현장에서 일감을 따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고 경쟁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일감을 몰아받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거 총수에게 집중된 내부거래 이익은 이제 자녀들에게 쏠리는 경향이 짙어가고 있다.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법 위반 여부 검토를 끝내고 곧 제재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그러나 웬만한 기업들은 이미 그물망을 빠져나갔다. 경제검찰 공정위의 법 집행과 현행 일감 몰아주기 규제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물류회사 현대글로비스 지분 52.17%를 보유하던 현대차그룹 총수 일가는 지분 매각을 통해 규제 기준인 30%에 약간 못 미치는 29.9%로 지분을 줄여 규제 대상에서 벗어났다. 광고회사 이노션 지분도 29.99%에 맞췄다. 현대엠코는 현대엔지니어링과 합병해 총수 일가 지분을 35.6%에서 16.4%로 낮췄다. 삼성그룹에선 제일모직(옛 삼성에버랜드)이 내부거래 비중이 높은 식자재 부문을 떼어내 삼성웰스토리라는 자회사를 신설했다. 이러한 간접지배 방식은 현행 공정거래법에선 제재하지 않는다.

규제 회피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지분매각, 간접지배, 합병·분할 따위의 방식으로 빠져나가는 방법은 더 교묘해졌다. 약간의 지분 조정이나 사업부문 조정만 하면 어렵지 않게 법망을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올해 대기업 인사에서는 재벌 3세에 이어 4세까지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 현대중공업과 한화그룹, 코오롱그룹 등의 회장 아들들은 전무와 상무로 한 단계 올라섰다. 모두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다. 지에스(GS)그룹은 4세들이 대거 승진했다. 이들의 승진 잔치는 제조업 전반에 실적 부진으로 감축과 감원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현실과는 딴판이다.

홍대선 경제데스크 겸 산업1팀장
홍대선 경제데스크 겸 산업1팀장
며칠 전 서울대생이 “생존을 결정짓는 건 전두엽(두뇌)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공정한 경쟁이 어디 기업이나 취업 시장만의 일일까마는 적어도 경기장 안에선 페어플레이를 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시작도 하기 전에 승부가 결정돼 있다면 세상이 너무 절망적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홍대선 경제데스크 겸 산업1팀장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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