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우주론에 완전 압도된 후에야 ‘시간’이란 존재가 우주의 팽창으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 그 138억년 전의 빅뱅 이전과 187억년 후의 태양의 죽음 이후에 대해, 그리고 이 무한 팽창의 우주 바깥에 대해 아직 어떤 질문도, 따라서 어떤 예상도 가능하지 않음을 비로소 직감으로 받아들인다.
지방의 초등학생 시절은 과학실험이란 걸 해본 적 없고 고3은 문과를 선택했기에 미적분 개념도 익히지 못한 채 내 과학 교육은 끝났다. 그래서인지, 은퇴해 이른바 ‘자유 독서’가 가능해지면서 내가 자주 보고 싶어 고르는 책이 과학도서이다. 물론 전문 연구서가 아니라 근년 우리 출판계에서도 활발하게 간행되는 인문적인 교양 과학책들이다. 과학자의 전기거나 발명 발견에 얽힌 이야기거나 쉬운 진화론 같은 과학사와 과학 칼럼의 뒤범벅이다. 과학에 대한 내 이해력은 유치해서 기초 개념도 몰라 청맹과니로 넘기는 게 대부분이지만, 모르기에 과학자들의 진리를 향한 집념들이 오히려 박진하게 울려오는 경우도 잦다. 근래 본 과학책들에서도 그랬다.
내 과학 독서 목록에는 드문 한국인 저자의 책으로 이종호의 <과학의 순교자>는 내가 이름을 모르거나 그 사정을 듣지 못한 여러 과학자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질소 고정법을 개발해 노벨상을 받은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1868~1934) 이야기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탄화수소 분해에 관한 연구로 주목을 받은 그는 카를 보슈와 함께 질소를 수소와 화합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획기적인 ‘하버-보슈 공정’을 개발했다. 질소비료 생산이 이래서 가능해졌고 그는 이 연구로 큰 수입을 올렸거니와 오늘날 “70억을 돌파한 전세계 인구가 과거보다 더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는 유대인 출신임에도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로이센 전통의 독일 군대에 충실히 복무하며 “독일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고 독일에 봉사하고자” 했다. 그런 그가 나라의 지시를 받고 시작한 독가스의 개발에 성공하자 그 소식을 들은 역시 유망한 화학자인 유대인 아내 클라라는 남편에게 “마지막 작별의 글을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 이렇게 아내를 잃은 그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막스 플랑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장직에서 추방당했고 바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독일에 대한 남다른 충성과 그럼에도 그 나라로부터의 쫓겨남, 인류의 기아를 해소할 거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잔인한 무기로 금지될 독가스의 개발, 유대교를 포기했음에도 유대인이란 이유로 당한 퇴출, 나라의 명으로 새 무기 발명에 성공하고도 이에 항의하는 아내의 자살 등, 나에게 생소한 한 화학자의 기구한 생애는 안타까운 운명에 대한 곤혹스런 연민을 안겨주었다. 과학에는 없어야 하지만 과학자는 피할 수 없이 매이고야 말 ‘국적’이란 난감한 문제를 깨우쳐준다. 하버의 경우는 다이슨의 <과학은 반역이다>에서 소개되는 수학자 데이비스와 대조되고 있다. 1950년대의 매카시즘 시절, 하원의 반미위원회 조사를 받는 중 친공적인 동료를 밀고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차라리 반년간 옥살이의 유죄 판결을 택했다. 다이슨은 데이비스와 함께 소련의 사하로프를 비롯한 ‘반역적’인 과학자들을 소개하면서 센더스 홀데인이 ‘이단자들의 모임’ 강연에서 피력한 과학에 대한 세 관점을 옮긴다: “과학이란 이성과 상상력이라는 신성한 재능을 가진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며; 다수가 요구하는 부와 안락과 승리에 대한 소수의 대답으로 평화와 안전과 불황에 대한 대가로 허락되는 선물이고; 공간과 시간, 더 나아가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생물들 그리고 종국에는 인간의 영혼을 예속하고 있는 어둠과 악까지 차례로 정복하는 과정이다.”
이상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실의 과학과 과학자는 이처럼 수정같이 투명한 세계에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연구하고 발언할 수 없는 게 진실이리라.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펼친 빌 매키번의 <우주의 오아시스 지구>는 내 예상과는 달리 온난화로 말미암아 일어날 ‘지구적 파탄’에 대해 강경하게 고발하고 있다. 10년 안에 지구 기온이 섭씨 4도 오를 것이란 연구 결과를 놓고 인류의 미래에 비관하게 된 케빈 앤더슨의 고심이 여기서 소개된다: “학자로서는 내 연구가 매우 잘 진행된 연구이며 믿을 만한 결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누군가가 내 연구의 실수를 지적하면서 연구 결과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해줬으면 싶었다.” 지구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위해 오죽하면 자신의 연구가 틀리기를 바랐을까. 다이슨처럼, 그리고 하버와는 달리, “윤리적 진보를 동반하지 않는 기술적 진보가 선보다 악을 더 조장할” 경우에 대한 과학자의 두려움이 넘친다.
그럼에도 나는 과학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상상력을 발견하고 내면적 희열까지 느꼈던 것을 고백해야겠다. 영국의 과학저널리스트 길리랜드가 그림과 사진과 쉬운 글로 가르쳐주는 <우주 탄생의 비밀>에서였다. 1931년 조르주 르메트르의 발표로 연구되는 빅뱅 이론 설명에서 저자는 이 ‘대폭발’을 “어제가 없던 어느 날” 문득 터진 우주적 사태로 소개하고 있다. 아, 다시 뇌는, 그리고 또 빠져드는, ‘어제가 없던 어느날’(!)이 일으킨 그 절망과 열망, 창세기적이기보다 차라리 묵시록적인, 엄청난 빅뱅의 개벽, 여기서 공간과 시간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양성자 크기의 0과 0.1 사이에 20개의 0이 낀 그 극미한 것 하나가, 0이 31개 붙은 숫자분의 1초 동안 폭발하면서 우주가 탄생했고 그 크기가 10의 78승으로 팽창했다는 것이다. 이 시간적 공간적 초극소에서 초극대로의 인플레이션은 인간적 심안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영원을 상념케 하는 불교적 초월로도 견주기 어렵다. 찾아보니 불교에서 가장 짧은 시간인 ‘찰나’는 75분의 1초(0.013초)이고 가장 긴 시간인 ‘겁’은 40리 바윗덩이가 선녀의 비단옷으로 스쳐 닳아 없어지기까지의 4억3천만년이었다.
무한 상상으로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이 거대한 우주론을 앞에 두고 완전 압도된 후에야 늘 궁금했던 ‘시간’이란 존재가 우주의 팽창으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 그 138억년 전의 빅뱅 이전과 187억년 후의 태양의 죽음 이후에 대해, 그리고 이 무한 팽창의 우주 바깥에 대해 아직 어떤 질문도, 따라서 어떤 예상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비로소 직감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는 사실이나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영원과 무궁(‘세계’ 혹은 ‘우주’란 말도 한계를 전제하고 있다)에 압도될 뿐, 달리 어떤 사유도, 상상도, 그러니 희망은 물론 허망마저 느낄 여지를 주지 않고 오직 ‘무한자유’만 직감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아닌 우주적 시-공간이다. 그 장관을 공상하며, 묵은해가 가고 새날이 다시 오는 이 치사스런, 그렇기에 다정해야 할 일상의 반복에서 참으로 설움에 북받친 귀중한 축복을 느낀다.
동심을 자극하는 성탄절을 맞으며, 실감할 수도, 가늠되지도 않는 우주론에 왜 내가 이처럼 감동할까. 홍정선 교수가 중국에서 얻었다며 선물한 3억년 전의 히말라야산 암모나이트 화석을 아득히 바라보며 그 탁자 옆에 옮겨 적어놓은 정현종의 <시간의 그늘>을 다시 읽는다. “시간의 그림자는 그리하여/ 그늘의 협곡/ 그 끝의 단층을 이루고/ 거기서는/ 희미한 발소리 같은 것/ 희미한 숨결 같은 것의/ 화석이 붐빈다/ 시간의 그늘의/ 심원한 협곡/ 살고 죽는 움직임들의/ 그림자/ 끝없이 다시 태어나는(!)/ 화석 그림자.” 시를 많이 인용하는 과학자 다이슨의 “과학은 철학적 방법이 아니라 예술의 한 형식”이란 과감한 말에 나는 공감 중인 듯하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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