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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영진위, 어디를 보는가 / 남은주

등록 2016-01-03 18:48

“위원장님께선 저희 독립영화 감독들과 제작사가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는지 아십니까?” “감독님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얼마나 먼지 아십니까. 그 먼 거리를 케이티엑스 타고 오가면서 일 보느라 저도 요즘 많이 어렵습니다.” 지난해 11월26일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에서 한 독립영화 감독과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김세훈 위원장 사이에 촌극 같은 대화가 오갔다.

영진위 위원장이 축하 인사를 위해 단상에 올랐을 때 객석에 앉아 있던 경순 감독이 영진위가 추진해온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의 문제를 지적하자 분위기는 급히 얼어붙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토론하거나 해명하기보다는 “나는 정치인이 아니므로 정치적으로 풀 길이 없다”는 말로 답을 피했다. 영화제가 열린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영화계에서 이 문답이 두고두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영진위와 영화인들 사이의 소통 상황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예이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최소 생계비도 지원되지 않는 ‘영화 제작 현장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동안 위원장은 ‘행정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지난 한해 동안 영진위가 불러일으킨 논란은 다양했다.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 말고도 영화제 상영작에 대해선 지금까지 등급 분류를 자동으로 면제해주던 제도를 폐지하고 앞으론 사전 심의를 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고, 영화발전기금으로 영진위 부산 신사옥과 글로벌 영상센터를 짓겠다는 시도도 있었다. 영화제 상영작 사전 심의는 영화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취소됐다. 영화발전기금으로 신사옥을 지으려던 시도는 슬금슬금 꺼내들었다가 반대 목소리가 크자 유예됐다. 영화발전기금은 관객들이 내는 영화입장권 1만원 중 3%를 영화 제작·유통·해외진출 지원 등 한국 영화와 영화인 육성에 쓰도록 만든 돈이다. 한국 영화 종잣돈을 사옥 건립에 쓰겠다는 것은 애초부터 명분도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 사업은 위탁사업수행자가 선정한 영화를 영진위가 지정한 시간대에, 일정 횟수 이상 상영하는 예술영화전용관에만 지원금을 주겠다는 안이다. 만약 그대로 된다면 다양한 영화 상영을 생명으로 하는 전국 독립·예술영화 전용관들이 모두 비슷한 영화를 상영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아무도 이 사업에 응모하지 않자 영진위는 상영 시간이나 횟수 규정을 고쳐서라도 여전히 시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영화인을 위한 지원사업이 영화인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데 왜 강행하는 것일까? 영화제 상영작 사전 심의나 기관에서 지정해주는 영화를 상영하라는 예술영화 유통·배급 지원사업은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사전 심의와 정부 주도를 강화하는 정책들이다. 영화계에서 “<다이빙벨>이나 <카트>처럼 정부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들이 상영 기회를 잃고 고사하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영진위 신사옥 건립은 박근혜 대통령 공약이었던 부산국제영상콘텐츠밸리 조성사업과 관련돼 있다. 김세훈 위원장은 자신이 “정치인이 아니라 문화예술인”이라고 강조했지만 공교롭게도 지난해 영진위의 헛발질 모두가 정치와 관련되어 있다.

남은주 대중문화팀 기자
남은주 대중문화팀 기자
한편으론 이번 해프닝 때문에 영진위원장이 앞으로 더더욱 영화인들과 말을 섞지 않는다면 어떡하느냐는 우려도 있다. 그만큼 영진위와 영화계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천만관객 시대를 맞은 한국 영화는 독과점 현상 심화, 400만~500만 관객이 모이는 중간급 영화 실종, 다양성 영화 상영관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듭 지적돼 왔지만 아직 어떠한 대안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것이 영진위가 손댈 일이다.

남은주 대중문화팀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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