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
한·일 정부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일본군 위안부 해법 합의는 가히 헬라어 ‘테텔레스타이’ 수준의 선언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했던 단말마다. 속량을 뜻하는 이 단어는 노예의 몸값을 치른 뒤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고대 경제용어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영원한 용서와 구원의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값’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려고 자신의 외아들을 내줄 정도로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창조주라 하더라도 인간의 죄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르고 받아야만 했고, 퍼주는 은혜에도 조건이 붙었다. 이른바 회개와 구주 영접. 아무리 하나님이어도 죗값과 반성 없이는 죄를 용서해줄 수 없다는 얘기다.
위안부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한국을 포함해 수만~수십만 아시아 여성을 상대로 저지른 국가범죄다. 피해 당사자도, 그렇다고 신도 아닌 대통령이, 외교부 장관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외교’라는 명분으로 위안부 문제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를 해줄 수는 없다. 심지어 일본 총리는 사죄와 반성을 하지 않았으므로, 대통령과 외교부 장관은 10억엔을 받고 수만명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도 못 하는 ‘회개 없는 용서’를 퉁친 셈이다.
공교롭게도 일본 여행 중에 한·일 정부의 합의가 나왔다. 하필 초등학생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페이스북에 교토 맛집 사진을 올리려던 찰나에 성난 ‘페북 친구’들의 위안부 해법 성토 글이 화약처럼 터져 올라왔다. 물색없는 일본 여행 자랑질 사진들을 미처 다 수습하기도 전에 아이의 질문이 쏟아졌다. “엄마, 위안부가 뭐예요?” “엄마,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게 뭐예요?” “엄마, 한국이랑 일본이 뭐 잘못했어요?”
신도 못하는 용서를 해주겠다는 정부의 결정을 일개 ‘엄마’가 설명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갓 초등학교 문턱을 넘은 아이한테 이 역사를 날것 그대로 들이밀 엄두가 안 났다. 더구나 초등학생쯤 되면 굳이 신학을, 외교를 몰라도 본질을 통찰한다.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 애들을 심하게 괴롭혔는데, 우리 선생님이 다른 반 담임한테 사과도 안 받고 돈 받고 용서해줬다’는 부정의를 거짓말 없이 납득시킬 방도는 없었다. 지난 10월 ‘대한민국 자긍심’ 운운하며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던 정부가 저질러 놓은 이율배반적 외교 참사에 분통이 터졌지만, 나 스스로 아이한테 할 말을 찾을 때까지 ‘역사 공부는 집에 가서’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직접 보고 느낀 일본의 맛과 멋을 좋아했다. 특히 교토의 료칸 주인 ‘오마상’ 할머니의 몸에 밴 친절은 아이를 감동시켰다. 한국말 한마디 못하는 할머니는 일본말 한마디를 못하는 꼬맹이에게 정성껏 다도를 가르쳐줬다. 마지막 날엔 료칸 밖으로 나와 우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 아이에게 일본은 ‘친절한 오마상의 나라’였다. 당연히 미래 세대의 한-일 협력에 걸림돌이 될 만한 적대감이 똬리를 틀 이유도 없어 보였다. 과거사와 역사 왜곡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양국 정상이 합심하여 위안부 문제를 덮는다고 해서 미래 세대의 위안부 문제 해결 부담이 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사죄와 배상이 동반된 ‘테텔레스타이’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전정윤 사회정책팀 기자 ggum@hani.co.kr
전정윤 사회정책팀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