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에게 ‘위안부’라는 사안이 과연 ‘해결’하고 싶은 과제였을까. 해결하고 싶은 의지는 분명해 보이는데 그들의 해결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생각하는 해결과 같은 의미를 품고 있지 않다. 한국의 집권자들에게 ‘위안부 문제’란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기에 현 정부는 이 걸림돌을 치워서 없애버리는 것이 해결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무지개 깃발이 곳곳에 펄럭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명한 벽화 중 하나는 ‘위민스 빌딩’을 덮고 있는 그림이다. 여성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이자 여성운동을 하는 조직인 위민스 빌딩의 벽화 제목은 ‘마에스트라피스’다. 건물을 따라 돌면서 그림 속 여성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한 인물이 들고 있는 팻말 속에 스페인어로 쓴 문구가 보인다. “침묵=죽음”. 말하도록 내버려 두기, 그 시끄러운 투쟁이 평화다.
침묵은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영향력이 전혀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의 유족들이 요청한 면담을 거절했으며, 공권력의 폭력에 쓰러진 농민 백남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언제나 침묵했다. 권력의 침묵에는 힘이 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얻고 싶은 목적을 달성하고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다. 권력자의 침묵은 그의 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때로는 공포를 유발하기도 한다. 반면 피해자나 약자의 침묵은 그들을 제외한 주변을 평화롭게 만든다. 오직 그 침묵 속에서 피해자만 서서히 질식하면 주변은 아무 문제가 없다. 이는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모든 전쟁에는 강간이 반드시 동원된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은 2만여명의 무슬림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강제 임신을 주도했으며 낙태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적국 남성의 재산(여성) 파손이며 무슬림 말살을 위한 ‘인종 청소’였다. 그러나 전쟁 중 강간 피해자는 ‘전쟁 피해자’가 되지 못하고 여성 개개인이 오롯이 피해를 감당한다. 영화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내전의 조직적 성폭력 피해자인 에스마와 집단 강간으로 태어난 그의 딸 사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보스니아에서 오랫동안 말해지지 않은 문제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역할을 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박근혜 개인의 가문의 영광을 위한 사적 기억을 역사화하고 있다. 반면 반드시 기억하고 싸워야 할 집단의 역사를 소멸시키는 중이다. 소녀상은 ‘소녀’상이라기보다 소녀에서 할머니가 되는 ‘세월’을 담은 상이라 볼 수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들은 말하지 못한 채 고통을 몸에 새겨 왔다. 목소리가 필요한 이들은 언제나 침묵을 강요받으며 고통을 사회화시키지 못하고 소멸해버린다. 그렇기에 ‘침묵은 죽음’이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이는 앞으로 ‘완벽한 침묵’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강요된 침묵에 맞서는 방법, 그것은 이 강요를 ‘무시’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에게도 물려주며 계속 기억해야 하고 말해야 할 사안이지 ‘화해’라는 이름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위안부 피해자가 외교 차관에게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했다. 조국은 국민을 선택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이 없다고 했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조국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조국이 없는 이들을 보고 있다. 바로 온몸에 폭력의 흔적을 새긴 채 누워 있는 농민 백남기와 위안부 피해자들이다. 그렇다면 조국이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아니, ‘국가’에는 누가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바로 하고 싶은 말만 해도 되는 자들이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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