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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만평 소재가 넘쳐 행복하냐고요?

등록 2016-01-08 18:59수정 2016-01-09 11:10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촌철살인’ 권범철 화백이 만평 소재를 얻는 방법
반갑습니다. 지난해 10월부터 한겨레 그림판을 그리고 있는 권범철입니다. 여러 매체를 거쳐 왔지만 한겨레 그림판의 무게는 남달라 매일 높은 산을 오르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애정 어린 비판으로 견디고 있답니다. 흔히 글보다 친절한 것이 만화인데 만화보다 친절한 글을 쓰려니 제 영혼까지 친절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만평 그리는 일의 속사정을 조금 말해보려 합니다.

월급 받으며 매일 만평을 그리는 일이 흔한 직업은 아니죠. 그래서 회사 밖으로 나가면 다양한 질문을 받습니다. “매일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어?” “그 많은 기사를 다 읽는 거야?” “장도리 그리는 사람과 친해?” 같은 질문들이 쏟아집니다. 지면을 빌려 답을 하자면 “아이디어를 얻는 방법은 워낙 다양해서 정리하기 힘들며 ‘그 많은 기사’는 당연히 다 읽지 않고 장도리 작가는 아주 친하다고 할 순 없지만 좋은 감정을 갖고 아주 가끔 만나고 있습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받는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그렇게 그려도 안 잡혀가냐?”라든가 “술을 그렇게 퍼마시고 내일 마감은 어떻게 하냐?” 같은 걱정인지 의문인지 모를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최근’을 ‘최근 8년’으로 확장하면 대표 질문은 어렵지 않게 뽑을 수 있습니다. “요즘 만평 소재가 많아 좋으시죠?”가 그것입니다. 네, 소재가 많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난 정권은 유사 이래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국가재정과 정치외교안보를 위기로 내몰았기에 까도 까도 깔 것이 남았던 시절이죠. 그래서 시사만화가들이 뭉쳐 만평집을 내기도 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기억하라>였습니다. 오죽 기억할 것이 많았으면 그랬을까요?

이번 정부 들어 만평의 소재는 주로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정치인의 ‘말’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통령이 어린이집을 방문해서 “부모들이 돈 걱정 없이 자녀들을 맡기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면 이는 보육정책이 달라질 것이란 예고입니다. 마찬가지로 노인정을 방문해서 “어르신들을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이는 ‘노인정 난방비를 지원하겠다’ 같은 약속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말의 속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도 시사만화가의 일입니다. 가령 “이번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쌀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습니다”는 ‘쌀을 건드렸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탈당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말은 ‘지금부터 탈당을 생각해보겠다’는 뜻이죠.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최근의 예를 들자면 “소녀상은 거론하지 않았다”라든가 “성완종씨를 만난 기억이 없다” 등이 있습니다.

이렇듯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말’로 ‘행동’하고 있으며 그것이 만평의 소재가 됩니다. 그래서 입길에 오르는 대통령의 명언(?)이 쏟아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듣는 말이 “만평 소재가 넘쳐서 좋겠어”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럴 때마다 난감합니다. 대통령의 말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기운이 돕는다”는 말이 국가우주산업의 연구개발 예산을 늘린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혼이 비정상인 사람”을 탓한 것은 미등록 기 수련 ‘도사’들을 양성화해 지하경제 양성화 공약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닐 테죠. 심지어 “화살로 바위를 뚫는다”는 말은 양궁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메시지였을까요? 이런 소재로 만평을 그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권범철 편집국장석 화백
권범철 편집국장석 화백
“만평의 소재가 많아 좋으시죠?”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입니다. 뜻 모를 대통령의 말들이 중요한 이슈를 모두 삼키고 있기 때문이죠. 혼을 정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그 늪에 빠져 버릴까 걱정입니다.

권범철 편집국장석 화백 kart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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