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추모식에서 한 흑인 남성이 각국 정상들의 추도사를 수화로 통역했다. 전세계로 생중계된 남자의 수화가 엉터리였다는 사실이 얼마 못 가 밝혀졌다. 그런데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가디언>에 보낸 글에서 이 수화 통역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각국 정상들의 위선을 효과적으로 통역했다. 난센스로.”
흑인 대통령의 때이른 등장으로 남아공의 인종 갈등은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다. 각국 정상들은 인종 갈등의 최종적 해소를 외교적으로 공인하는 듯한 추도문을 읊었지만 그런 제스처는 정치적 불평등이 경제적 불평등으로 전화된 사실마저 매끈하게 지워버렸다. 여전히 인구 10%에 미치지 못하는 백인들이 남아공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이 조문 외교에 당사자 자격으로 참여한 유일한 사람은, 85달러를 받고 정상회담급 행사의 수화 통역을 담당한 흑인 남성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제크가 통역이 적절했다고 조롱했던 이유다. 난센스를 난센스로 통역했으므로.
2015년 12월, 한·일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합의에 도달했다. 위안부 합의에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단서가 못박혔다. 이 합의에는 적절한 통역이 없었다. 통역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한·일 양국이 공식적인 합의문을 작성하지 않는 데 비공식적으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에 대한 추가적이고 가역적인 해석을 쏟아내야 했다.
당사자를 배제한 채 국가 범죄를 일거에 해소하려는 시도가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절차적 정당성의 결여가 아니다. 무성성을 가장한 국가 체제의 남성격이다. 여성에 대한 국가 범죄는 ‘가부장 혹은 실소유자로서의 남성’의 위치에서 추상화된 자존심의 문제로 아주 쉽게 치환된다. 위안부 문제를 다룸에 있어 정부는 애완견 교통사고로 인한 재물 피해를 보상받으려는 견주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동아시아 안보를 위해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역사 수정으로 외교적 실리를 간단히 취할 수 있다면 위안부 문제로 그칠 필요는 없다. 한국전쟁을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으로 역사에서 소거해 버리는 쪽이 대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안착에도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또 다른 국가 성범죄에 대한 침묵은 이 상황에서 훌륭한 대조군을 제공한다. 위안부 증언록인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을 대상으로 자발적으로 운영했던 위안부 제도에 대해 사과는커녕 언급 자체를 피해 왔다. 주당 2회 위안부의 성병을 검진하는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을 입안하고, 이 법에 따라 격리수용한 위안부들에게는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할 때까지 항생제를 강제투여하는 인체실험에 준하는 범죄 행각을 벌였는데도 말이다. 당사자성이 완전하게 부인된 이런 문제는 마치 국가가 반성할 수는 있어도 대가를 치르긴 애매한 실책인 것처럼 취급된다. 피해자의 심리가 아닌 보호자의 심기가 죄질의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진주의 관기 논개는 조선 관료가 아닌 일본 장수에게 몸을 허하느니 절벽에서 몸을 던졌고, 시인 변영로는 그녀의 마음이 종교보다 깊고, 사랑보다 강하고, 양귀비꽃보다 붉다고 칭송했다. 여성의 신체 권리를 남성격의 국가가 승인한 범위의 절개로 재구성하는 ‘논개의 전설’은 현재진행형이다. 1960년대 한국 정부가 관리하던 오산 미군 기지촌의 여성회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명심하자! 지금 우리의 마음씨, 몸차림, 행동이 그대로 3천만 민족의 흥망과 직결되어 있음을!”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