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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저물가 함정 / 홍대선

등록 2016-01-17 19:22수정 2016-01-18 18:38

물가가 낮게 유지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마트에서 두부와 채소 가격이 떨어졌다고 기분 나빠하는 소비자는 없을 테니까.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다. 정부가 통계를 작성한 이래 최저치다. 담뱃값 인상 효과를 빼면 사실상 제로 수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느끼는 체감물가는 딴판이다. 정부는 0%대 장기 저물가 기조를 걱정하고 있다지만 서민들은 그게 무슨 말인가 싶다.

정부출연기관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파악한 장바구니 물가를 보자. 이 기관에서 지난해 12월 전국 3천여가구의 식품소비행태를 조사했더니, 장바구니 물가는 전년보다 12.2%나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체감물가가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물가보다 17배나 높은 셈이다.

저소득층이 느끼는 체감물가가 부유층이 느끼는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생각하면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다. 소득 하위계층일수록 식품비 지출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가계 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는 ‘엥겔지수’는 저소득층이 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식품비 비중이 낮은 부유층과 달리 빈곤층은 식품가격이 조금만 올라가도 큰 타격을 받는다.

공식물가가 체감물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긴 하다. 두 물가가 산정하는 소비 품목과 빈도가 일치하지 않는 탓이다. 물가 괴리가 크다는 지적에 따라 정부가 의식주 관련 품목을 따로 추려 산출한 물가상승률은 2.2%다. 이것도 공식물가와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렇게 공식물가와 체감물가 간 차이가 커지면 서민층은 이중으로 고통을 받는다. 한쪽에선 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을 뜻하는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데 정작 서민들은 생활비 부담이 늘어나 형편이 더 곤궁해진다. 자산가치가 하락하는 시기에 소득에 비해 빚이 많은 서민층 살림살이가 더 피폐해지는 이유다.

최근 저물가 속 물가 오름세는 이런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벌써 소주에 이어 두부와 달걀, 채소류 등 식료품 가격이 일제히 치솟고 있다. 주로 서민들이 많이 찾는 물품들이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먼저 가격을 올리면 나머지 업체들이 시차를 두고 슬그머니 따라 올리는 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낌새가 이상하다. 가격 인상 움직임에 눈에 쌍심지를 켜던 정부가 조용하다. 납세자 단체의 주장처럼 세수 확충과 디플레이션 방어(‘적정 물가’ 관리)를 위해 내버려 두는 것일까. 소주의 경우 국세청이 출고가를 실질적으로 통제·관리한 사실이 ‘소주값 담합 의혹’ 사건을 다룬 대법원 판결문(2014년 2월 2011두16049 판결)에서 확인돼 이런 의구심은 더 커졌다.

홍대선 경제데스크 겸 산업1팀장
홍대선 경제데스크 겸 산업1팀장
문제는 물가 오름세가 여기서 그칠 기세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가스요금을 제외하고 대부분 공공요금이 인상을 예고한 터다. 고속도로 통행료는 물론 시내버스와 택시 요금, 쓰레기봉투 값도 오를 예정이다. 상수도 요금은 평균 20% 안팎 오른다. 모두 실생활과 밀접한 것들이다. 마치 이명박 정부 때 ‘가격 통제’로 눌러왔던 요금들이 두더지처럼 머리를 내미는 꼴이다. 소득은 정체인데 체감물가가 이렇게 뛰니 직장인들 사이에서 “내 월급 빼곤 다 오른다”는 푸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벌이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가구는 400만을 넘는다. 청년(15~29살) 실업률은 사상 최고치인 9.2%다. 서민들은 전세난, 빚갚기로 지쳐가고 청년들은 취업절벽에 서 있는데 이렇게 물가마저 뛰니 미칠 지경이다. 민생에 깊게 팬 주름살을 조금이라도 펴주는 게 정부가 할 일 아닌가. 저물가 함정에 빠져 팔짱을 끼고 있을 때가 아니다.

홍대선 경제데스크 겸 산업1팀장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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