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며느리들의 언어 / 김현경

등록 2016-01-18 18:43

민주주의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개혁을 표방하는 정치인이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하겠노라고 다짐할 때, 진보정론지를 자처하는 신문이 ‘힘없는 민초’나 ‘멍든 농심’ 같은 표현을 무심하게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그렇다. 왜 서민은 늘 눈물을 흘리는가? 농심은 왜 항상 멍이 들어 있고, 민초는 힘없이 짓밟히기만 하는가? (그리고 왜 꼭 ‘농심’이라는 단어를 쓰는가? 농민에게는 ‘마음’만 있고 ‘머리’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농민이 머리를 굴리면서 이해득실을 따지면 안 되는 것일까?) 이런 표현들 속에서 민중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나라님’의 명령을 따르는 백성으로, 스스로 정부를 세우고 법을 만드는 시민들이 아니라, 정치가 뭐고 법이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무지렁이들로…. 그들은 정의를 요구하는 대신 동정을 구걸한다.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그저 선처를 부탁한다.

보수언론이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민중이 계속 착하고 불쌍한 역할을 맡기를 바라니까(민중이 이 역할을 거부하고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순식간에 논조를 바꾸어 ‘이기주의’라느니 ‘정치적 의도’가 있다느니 비난을 퍼붓는다). 문제는 진보언론 역시 착하고 불쌍한 민중의 이미지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이 한창일 때 여러 매체에서 기사 제목으로 사용하였던 ‘할매들이 뿔났다’ 같은 표현이 좋은 예이다. 이 표현은 밀양 주민들은 순박하고 힘없는 노인들이고 어지간하면 화를 내지 않을 사람들임을 암시한다. 위정자들이 웬만큼만 잘했어도 참고 살았을 텐데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데모’를 하게 되었다는 투이다. ‘10대들도 뿔났다… 한 고3 문과생의 국정화 반대’ 같은 제목도 그렇다. 이 제목은 ‘조용히 공부하고 싶었지만 정말 그럴 수 없어서 거리로 나온 10대’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즉 10대가 거리로 나오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위기상황이고 비상사태라는) 관념을 부지불식간에 전달한다. ‘뿔났다’는 표현은 이처럼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게 순박한 이미지를 덧씌움으로써 그들을 정치적 장에서 주변화하고, 그들의 요구를 제한된 수준으로 묶어놓는 효과를 가져온다. 정치 참여는 여전히 교육받은 중산층 남성의 전유물로 남는다. 나머지 계층, 수사학적으로 여성화된, 혹은 거세된 계층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뿔났다’는 표현이 유행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끈 다음부터라고 알고 있다. 가부장적 질서를 코믹하게 그린 드라마 제목이 신문 기사 제목으로 빈번하게 패러디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언론이 그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가부장적 대가족에 가깝다. 이 가부장적 대가족 안에서는 타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나의 권리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민주사회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대신에 ‘난 더 심한 것도 참는데 넌 왜 그것밖에 못 참니?’라는 며느리들의 언어가 지배한다. 누가 더 착한 며느리인가? 누가 더 희생적이고 불쌍한가? 누가 더 일을 많이 하고 밥을 적게 먹는가?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새해에는 우리 모두 며느리들의 언어에서 벗어나기로 하자. 그러려면 무엇보다 ‘정치적’이라거나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이 되는 것이야말로 민주시민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질이다. 이기주의로 말하자면, 사회계약론은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사회계약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1.

[사설] ‘탄핵 반대’ 권영세 비대위원장, ‘도로 친윤’ 선언한 국힘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2.

독재자의 후예와 그 동조자들 [박현 칼럼]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3.

윤석열은 가도 국민의힘이 남는다. 그게 문제다 [아침햇발]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4.

경호처 직원들, 끝까지 비겁한 윤석열에게 인생 걸 텐가? [1월3일 뉴스뷰리핑]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5.

[사설] 윤석열 체포 불발, 제2의 내란이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