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사안을 다룬 두 개의 글에서 발견한 어떤 현상.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주의자인 주세죽을 다룬 소설이 나왔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기사를 찾아보았다. 소설은 못 봐서 모르겠으나 이를 다룬 기사는 첫 문단부터 구석구석 한숨이 나오게 했다. 미모, 미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그의 ‘민족의식’은 이렇게 설명된다. “감옥에서 일본 경찰에게 능욕을 피하다가 가슴에 담뱃불 상처를 입을 만큼 민족의식도 갖고 있었다.”(<오마이뉴스> 1월27일) 여성의 몸은 ‘민족의 몸’이다.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비슷하다. 내친김에 다른 기사들을 찾아봤다. “조선 최고의 미인”은 주세죽이란 인물을 소개하는 데 마치 없어서는 안 되는 수사처럼 반드시 등장했다.
이제 또 다른 글. 자국의 국기를 방송에서 흔들었다는 이유로 공식 사과를 해야 했던 가수 쯔위로 인해 대만과 중국 간의 정치적 관계를 다룬 기사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그중에 좀 ‘독특한’ 시각의 글이 있었다. 대만의 ‘친일’ 정서를 고려하면 중국 누리꾼만의 문제는 아니라며 중국의 입장에서 친절하게 서술했다. 이에 대한 비판적 의견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기에 생략하고, 마지막 문단에 내가 지적하려는 내용이 있다. “18세 대만 소녀 쯔위, 분명 여느 소녀들과 같이 정치에 관심도 없고, 잘 아는 것도 없을 것이다.”(<프레시안> 1월28일) 남성 중심 시선에서 볼 때 여성은 ‘생각하지 않는 몸’이다.
1901년생인 주세죽이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으니 당시 그는 지금 쯔위와 비슷한 또래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파키스탄의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0대 초반부터 여성교육에 대한 글을 썼다. 과거로 돌아갈 필요도, 다른 나라를 볼 필요도 없다. 현재 한국에서, 국정 교과서나 소녀상 이전 등의 사안에 반대하는 소녀들은 꾸준히 집회와 1인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쯔위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정치에 관심이 없고, 잘 아는 것도 없을 것”이라 쉽게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의 견해는 줄곧 청소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에 대해 소녀들은 분개해야 한다. 젊을수록, 여성일수록, 의견은 지워진다. 그렇게 지웠다가 필요에 따라 ‘촛불소녀’로 호명하듯이, 이 사회는 젊은 여성들의 정치의식에 대해 언제나 ‘처음 있는 일’인 양 호들갑스럽게 바라본다.
일제 때 사회주의자 여성은 마르크스 걸, 엥겔스 걸, 레닌 레이디라 불렸다. 언론의 관심은 주로 이들의 연애사. 고뇌하는 남성들의 성적 파트너 역할, 곧 ‘누구의 여자’라는 틀에 갇혔다. 여성의 창작이나 의견은 계속 지워지기에 여성들은 후대에 꾸준히 ‘재발견’된다. 의견을 지우는 대신 그 자리에는 여성의 외모 품평과 사생활이 들어선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를 보라.)
‘재색 겸비’는 여성을 칭찬하는 흔한 수사다. 심지어 살해당한 피해자도 ‘미모의 여대생’으로 불린다. ‘미모’를 빼면 여성에게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 외모 칭찬을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을 폄하할 때도 외모를 걸고넘어진다. 프랑스에서 플뢰르 펠르랭이 장관이 되자 이 ‘젊은 한국계 여성’에게 차별적인 질문을 쏟아낸 기자가 있었다. 그의 질문 중에 하나는 “당신이 예뻐서 (선택된 거 아니냐)?”였다. 예쁘면 예뻐서 능력을 폄하하고, 안 예쁘면 그 자체로 민폐, 문제다. 칭찬이냐 비난이냐를 넘어, 대부분의 사회는 여성의 외모를 언급하는 태도에 무한히 관대하다. ‘효녀’의 맥락을 읽지 않고 효녀의 외모를 ‘좋은 뜻으로’ 언급하듯이.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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