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과 일본 정부를 똑같이 취급했다.” 하지만 그런 <제국의 위안부> 이후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는 이들과 민족주의자는 똑같이 취급당했다. 위안부 논쟁은 여성주의와 민족주의의 대결로 함몰했고, 이 선정성은 정밀한 관점의 참전을 어렵게 만들었다. 박유하는 그게 자신을 보호해줄 유일한 방패임을 알고 있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의 전반부, 사악한 조선인 포주와 인간적인 일본군의 일화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위안부 문제의 책임이 가부장적 국가제도에 있다는 주장을 수긍한다.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제발 논쟁을 망치지 말고 조용히 빠지시라. 그게 쟁점이라면 나는 박유하의 편이다. 그러나 <제국의 위안부>는 남성 중심 사회의 연대책임을 묻는 여성주의적 해석에 그치지 않고, 인신매매의 물리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 제국만을 면책시키는 법리적 궤변으로 나아갔다. 문제의 대목이다. 작가 박유하나 사료연구자 박유하가 아닌, 박유하 재판관이 판결한 뒤쪽 절반.
박유하는 식민지 체제에서 불법이 아니었기에 일본군에 법적 책임은 없으며, 위안부 문제는 국가범죄가 아닌 개인범죄라고 주장한다.(191쪽) 그리고 범죄자가 모두 세상을 떠난 이상, 법적 책임을 물을 대상은 사라졌다고 강조한다.(193쪽) 역사에서 이와 가장 유사한 법리 해석은 5·18 쿠데타를 불기소 결정했던 검찰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그 자체 법질서이므로 가벌성이 없다고 선언했지만 정부와 국회는 특별법으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판결로 검찰의 저항을 고꾸라뜨렸다. 국가범죄의 판단은 정치의 영역이다. 법리보다 위태로워진 것은 박유하가 허수아비로 세웠던 페미니즘이다. 위안부가 국가범죄가 아닌 개인범죄의 희생양이라면, 왜 위안부는 개인범죄가 아니라 가부장적 국가제도에 희생된 것인가?
이어 박유하는 위안부 손해배상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방기를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한 것은 오판이었다며 사법부 최종심급 판결을 손수 파기환송하는 기염을 토한다.(228쪽) 그녀는 위안부를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여성으로 보기 때문인데, 그 근거는 무려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이다. 그런데 이 조약 제1조를 따르자면 위안부의 한국 국적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 자체가 무효다. 제1조는 한국의 통치권이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어갔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국적을 초월한 남성간 공모를 문제 삼을 수도 없다. 제1조에 따라 조선인 포주는 모두 일본인 포주가 되었으니까.
박유하는 일본 변호사 아이타니 구니오의 논문을 길게 인용한 뒤 심지어 인신매매의 주체가 일본 정부라 하여도 배상 청구는 불가능하며, 미지불 노동 보수 지불만이 가능하다고 못박는다.(241쪽) 하지만 이는 왜곡이다. 아이타니 구니오는 ‘부인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이 손해배상책임의 직접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만 썼다. 정영환 메이지학원대학 교수에 따르면 논문 전문은 오히려 ‘입법을 통한 국가배상책임’을 주장하고 있다.
여성 동원의 강제성을 사법적 정범 판단의 준거로 끌어다대는 순간 일본뿐만 아니라 박유하가 명목상으로 겨냥하는 가부장적 국가제도 역시 면책된다. 만약 정부과천청사 내에 공무원을 위한 위안소가 설치된다면 국가를 빼고 여성을 공급한 포주만이 책임질 것인가? 포주의 영업마저 자율적이라면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제국의 위안부>에 사용된 논증의 필연적 귀결은 ‘피해 여성 각자의 책임’뿐이다. 제국의 궤변이다.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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