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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이름과 직함 / 김현경

등록 2016-02-22 19:44수정 2016-02-23 15:50

나는 ‘사회에 진출’한 이래 계속 명함 없이 살아왔다. 한 대학에 연구원으로 취직했을 때 연구소 쪽에서 명함을 만들어 주었지만, 곧 그만두는 바람에 몇장 써보기도 전에 모두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내밀 명함’이 없는 처지다. 다시 말해 뚜렷한 소속이나 내세울 만한 직함이 없다.

그런데 소속과 직함이 없다는 것은 핸드폰이 없는 것과 비슷해서, 당사자보다는 오히려 주변 사람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걸 느끼게 되는 순간이 강연이나 원고를 청탁받을 때다. 통화가 끝날 무렵이면 상대방이 으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온다.

“그런데 선생님 소속이 어디신가요?” “소속이 없는데요?” “그럼 이름 뒤에 뭐라고 쓸까요?” “글쎄요? 뭐라고 써야 하나?” “음… ‘인류학자’는 어떠세요?” “그것도 좋겠네요.”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나면 나는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은 심정이 된다. 사람들이 직함을 갖는 데 연연하는 것, 하다못해 아파트 동대표라도 해서 이름 뒤에 붙일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직함이 없으면,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더라도, 그를 위해 주변 사람들이 이름 뒤에 붙일 말을 애써 찾는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를 소개해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인류학자’를 자처하기 시작했지만, 그렇더라도 이 ‘인류학자’라는 직업을 직함처럼 사용하지는 말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최근에 내 책을 논평한 어떤 글에서 ‘김현경 인류학자는 이러저러하게 주장하였다’는 문장을 보았는데, 이런 식의 지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우선 내가 알기로는 이름 뒤에 직책이나 경칭을 쓸 수는 있어도 직업을 쓰지는 않는다. 직업은 ‘인류학자 김현경’처럼 앞에 오거나 ‘김현경(인류학자)’처럼 괄호 안에 들어가는 게 맞다. 물론 어떤 직업은 직함처럼 사용되기도 한다(김 변호사, 김 교수, 김 피디 등). 최근에는 이런 직업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에는 ‘작가 아무개는…’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아무개 작가’ 같은 표현이 자연스럽게 (내 눈에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지만) 사용된다. 작가도 변호사나 교수 못지않게 어엿한 직업임을 강조하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모든 직업으로 확대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직업 명칭이 직함을 대신하는 것은 그 직업이 전문성을 띠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환경미화원 같은 단순노무직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여전히 ‘환경미화원인 김씨는…’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결국 직업이나 직함을 이름 뒤에 붙여서 존중을 표시하는 관습은 공론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둘로 나누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름 뒤에 직함이 붙는 사람과 아무것도 붙지 않는 사람(또는 명함이 있는 사람과, 명함이 없거나, 있더라도 내밀 수 없는 사람). 이런 분리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경칭을 붙일 수 없다면 경칭을 아예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신영복이나 김대중 같은 ‘사회의 어른들’에 대해서만큼은 경칭을 붙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글을 평할 때만큼은 아무 경칭 없이 ‘신영복은 이러저러하게 말하였다’고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신영복’은 인격으로서의 신영복이 아니라,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서명된 글들 전체와 그 글들에 담겨 있다고 여겨지는 사유체계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의 말을 빌리면, 저자의 이름은 담론들을 분류하는 꼬리표에 지나지 않는다. 푸코나 부르디외에게 경칭을 쓰지 않는 것처럼, 신영복이나 김대중에게도 경칭을 쓸 필요가 없다.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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