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친일’이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견제도 불가능하고 언제든지 노골적인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무법 권력에 대한 부역행위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경우를 보라. 식민지 시대 부역자들이 그대로 권력을 이어받은 사회가 아니라면 자국민을 식민지 백성처럼 대하는 일은 가능하겠는가?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민족정기’가 아닌,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필요하다. 권력과 폭력이 거의 동의어가 된 이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한국 사회 폭력화의 한 주범인 친일파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결국 사회 전반의 탈폭력화의 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친일 문제를 거론하려 하면 민족주의자로 오해받기가 쉽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친일에 대한 단죄는 바로 민족주의적 논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한데 친일을 단죄하자면 굳이 ‘민족’이라는 프레임을 위주로 논리를 전개할 필요는 사실상 없다. 일제 강점기의 정치적 지배 관계는 “이민족 지배”라는 차원에서는 물론 ‘민족’을 궁극적으로 비켜갈 수 없지만 ‘친일’의 ‘일’은 ‘민족’으로서의 일본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일본 ‘민족’의 언어나 문화에 정통하고, 일본 동지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결코 정치적 의미의 ‘친일’로 이어질 필연성은 없었다.
김천해(1898~?)를 기억하는가? 울산 출신의 승려이자 계몽운동가로서 1921년에 도쿄로 건너간 그는 거기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나아가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공산당으로 흡수되고 나서는 일본 공산당의 중앙위원이 됐다. 일제 시절에 도합 12년이나 감옥에서 보냈는데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김천해는 수많은 일본인 동지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일본어나 일본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 한데 일본인들과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그를, 과연 누가 ‘친일파’라 부르겠는가? 일본어로 쓴 소설로 일제 시절 차별받는 조선인들의 이중적 정체성이나 ‘동화’에 대한 사회적 압력의 내면화 과정을 뛰어나게 묘사한 김사량(1914~1950)은 과연 ‘친일파’인가? ‘친일’의 ‘일’은 결국 ‘일본’이라기보다는 ‘일제’를 가리킨다. ‘친일파’는 정확히 말하면, 일제식민당국이라는 정통성 없는 권력에 참여했거나 “부당한 거래”를 자발적으로 진행한, 특히 이미 광의의 지배자적 위치에 있거나 그런 위치를 점하려 하는 피식민 사회 구성원을 일컫는다. 그들의 행위는, ‘민족적 배신’이라기보다는 “무법적 권력에 대한 부역”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계급사회의 권력은 늘 내재적으로 폭력적이다. 예컨대 계급지배관계를 본질적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법 절차 따위가 없을 때가 많다. 최근에 새로이 각광받은 <게공선>으로 유명한 일본의 프로문학자 고바야시 다키지(1903~1933)를 기억하는가? 공산당원인 그는, <1928년 3월15일>이라는 소설(1928년)에서 경찰들의 고문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공교롭게도 본인도 결국 검거당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공산당원이나 아나키스트 등 체제의 적극적 반대자에 대해서 체제는 종종 고문이라는 노골적인 폭력으로 대응했다. 한데 보통의 경우에는 일본 ‘내지’, 즉 자국 내에서는 일제 당국자들이 고문 등 극단적 폭력의 사용을 자제했다. 근대적 권력은 아무리 내재적으로 폭력적이라 해도, 그래도 ‘국민’ 다수의 동의를 기반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법·절차를 내세우게 돼 있다. ‘국민 국가’란 으레 그런 것이다.
한데 자국 내에서는 아무리 ‘자제’한다 해도 식민지나 점령지에서는 근대 국민 국가의 폭력성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식민지의 인민들은 ‘국민’이 아니거나 ‘2등 국민’이었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식민지에서는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 일본 ‘내지’에서는 급진적 활동가가 아닌 경우 고문은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피의자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폭력적 수사는 그냥 다반사였다. 공산주의자이긴커녕 열렬한 반공주의자이자 거물 친일파 윤치호의 사촌동생이기도 한-나중에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고 박정희 시절에는 서울시장과 공화당 의장까지 지낸-윤치영(1898~1996)마저도 온건한 유지급 인물들의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938년에 투옥됐을 때에 상당한 수준의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만약 ‘내지인’, 즉 일본인이라면 고문을 당했을 리가 없다. 한데 식민지에서라면, 일본인 형사에게는 가장 부유하고 보수적인 조선인 명망가마저도 그저 일개 폭력의 대상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친일’이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견제도 불가능하고 언제든지 노골적인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무법 권력에 대한 부역행위다. ‘민족’을 떠나서 이런 행위는 근대적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곳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부역행위를 하다 보면 본인도 결국 타자들을 향해서 그 노골적인 폭력을 대행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친일행위는 국내적으로도 토착사회 위에서 군림하는 폭력조직인 식민당국의 일원이 되고 폭력 종범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국제적으로도 일제의 가해행위에 가담하여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예컨대 박정희의 괴뢰 만주국 보병 제8사단 복무와 (아마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것으로 추측되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토벌’ 참가는 ‘민족 배신’ 차원을 넘어 나중에 동경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전쟁범죄인 일제의 중국 침략에 가담한 행위였다. 사실 상당수의 친일파들이 피침략 국가에서는 ‘악질적 침략 종범’의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나중에 문교부 장관과 여러 대학의 총장을 지내고 박정희의 ‘역사 교사’로 이름을 날린 사학자 이선근(1905~1983)은 만주국에서 일군에 군량미를 납부하는 안가농장을 관리했던 시절에 중국인에 대한 가혹한 태도로 중국 농민 사이에 악명을 떨쳤다. 친일파들의 이와 같은 중국 침략 가담은, 결국 나중에 연변의 조선인들을 보는 중국 사회 일각의 시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등 오랫동안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게 된다.
‘민족 배신’이라기보다는, 국내외적 권력형 폭력에의 가담이야말로 ‘친일파 문제’의 핵심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 일이라기보다는, 폭력 사회에서 정상 사회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친일파가 초기부터 사실상 권력을 그대로 승계해온 대한민국의 명백한 특징은, 식민지적 폭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오히려 확산된 것이었다. 조선인이라면 아무나 무조건 고문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친일경찰 출신들이나, 중국 등지에서 현지인을 학살하는 일에 익숙해진 일군 장교 출신들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테두리 안에서도 자국민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됐다. 광복 70주년이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이야기를 아마도 광복 100주년이 돼도 계속 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절대적 보호 아래서 반공의 ‘보루’가 되어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친일파들이 구사해온 식민지적 대민통치방식이 지금도 그대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경우를 보라. 그를 조준해서 물대포를 직사한 경찰의 행위를, 마땅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로 규정해야 한다. 정상 사회에서 경찰의 업무는 ‘질서 유지’라면, 그 어떤 폭력행위도 하지 않았던 백남기 농민에게 일부러 죽이려 하듯 물대포를 쏜 것은 ‘자국민과의 전쟁’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 권력형 범죄행각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도 책임자 처벌도 없다. 일부 지배층을 제외한 나머지 자국민들을 말을 잘 들으면 단순한 통치 대상으로, 말을 약간이라도 듣지 않으려 하면 제압해야 할 적으로 파악하는 듯한 통치방식은, 과연 어디에서 파생된 것인가? 식민지 시대 부역자들이 그대로 권력을 이어받은 사회가 아니라면 자국민을 식민지 백성처럼 대하는 일은 가능하겠는가?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그 의미가 불분명하고 억압적 느낌이 강한 ‘민족정기’가 아닌,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필요하다. 권력과 폭력이 거의 동의어가 된 이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성인 사회의 만연된 폭력이 학교 폭력으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주먹이 곧 정의라고 배워버리고 만다. 한국 사회 폭력화의 한 주범인 친일파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결국 사회 전반의 탈폭력화의 한 출발점이 될 것을,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열망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