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피로’(compassion fatigue)란 고통스러운 현실이 지속되면서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약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긴급구호 전문가나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 재난 현장에서 일하거나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동정피로를 겪기 쉽다. 그들은 엄청난 참상, 고칠 수 없는 병, 뿌리 깊은 가난과 불행 앞에서 압도되며 무력감을 느낀다. 재난 보도가 일상화된 오늘날에는 보통 사람들 역시 동정피로를 겪는다.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비극을 매일매일 접하면서 시청자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냉소적이 된다.
세월호 사건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2주기를 앞둔 지금, 곳곳에서 ‘세월호 피로증’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정말 많이 울었지만, 이제는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게 된다고. 어찌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정이란 무한히 인출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걸인이 지나가면 동정심 많은 사람들은 지갑을 연다. 하지만 그들도 조금 뒤 다른 걸인이 지나가면 못 본 체한다.
동정심이 고갈되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구실들을 생각해낸다. 그 사람이 실제로는 그렇게 비참하지 않다거나(벤츠로 퇴근하는 노점상이나 신촌에 건물을 소유한 껌 장수 할머니에 대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돈을 주어도 어차피 조폭이 빼앗아간다거나…. 세월호 유족들에게 가해지는 비난 역시 이런 각도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사태는 전혀 변한 게 없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변했다. 그러므로 이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사이에 나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그 경우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미 고갈된 감정을 한 번 더 쥐어짜야 한다) 유족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편하다. ‘죽은 자식을 앞세워 돈벌이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세월호 보도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는 사람이 있어도 그가 ‘메말랐다’고 단정 짓지 않으려 한다. 또 나 역시 그러고 있는 것을 깨닫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그보다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우리가 느꼈던 것은 그저 동정이었던가?
동정의 개념은 불행한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불행하지 않은 사람의 분리를 전제한다. 막스 셸러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아이의 주검 앞에서 울부짖는 부모를 두고 그들이 아이를 ‘동정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동정을 느끼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유족을 동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불행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이 겪은 일이 언제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미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지난달 삼성 갤럭시 부품을 만들던 파견 노동자 네 명이 메탄올 중독으로 실명 위기에 놓였다. “아무도 위험하다고 말해주지 않았어요.” 앞을 영영 못 볼지도 모르는 이십대 청년의 말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믿다가 죽은 아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메탄올 중독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규제완화가 만들어낸 풍경의 일부이다.
대한민국은 구멍 난 배들로 가득 찬 바다 같다. 매일매일 크고 작은 침몰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익사한다. 나 역시 언제 빠져 죽을지 모른다면, ‘동정’이란 너무 사치스러운 감정이 아닐까?
4월이 다가온다. 솔직히 말해 나는 오래전에 노란 리본을 치워버렸다. 내가 지금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유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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