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준주변부의 상층에 속하는 한국은, 최근 준주변부 재권위주의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이명박·박근혜의 민주주의 파괴를 국내적 현상으로만 이해하려 하지만, 국제적 현상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한국은 터키와 헝가리 사이의 중간적 수준에 해당할 것이다.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야말로 ‘실력자 시대’의 기원과 의미의 이해에 관건이 된다. 아시아 경제위기를 지나 준주변부 신자유주의화가 본격화된 후 준주변부 대기업들과 관료층들은 제한적 재분배가 아닌 신권위주의적 대내외 ‘적 만들기’, 동원 분위기 조성, 강압통치를 통한 ‘국민결집’을 노리게 됐다.
요즘 국외 영자신문들을 볼 때마다 항상 눈에 띄는 단어는 ‘strongman’이다. strongman의 사전적 해석은 ‘독재자’지만 사실 꼭 유신정권처럼 형식을 다 갖춘 군사독재는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실력자’와 같은 번역은 더 정확할 수 있는데, 그런 ‘실력자’들은 (많은 경우에는 부정의 혐의가 짙은)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얻는 절차를 밟더라도 그다음에는 민주주의를 폐지시키거나 형해화시키고 안보·경찰 위주의 체제를 구축해 피치자들의 저항을 차단시키거나 초강경 탄압한다. 국내외를 두루 봐도, 요즘 ‘실력자’들의 철권통치는 신자유주의 세계의 새 유행처럼 퍼져나간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형식적 민주주의마저도 아예 정지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2014년에 타이(태국)에서 군사정변이 일어나 헌정은 정지됐다. 현재 타이를 철권통치하는 사람은 그 군부의 ‘실력자’인 쁘라윳 짠오차 장군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바로 사법처리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 자체가 금지됐지만 이 군사정권이 외국 자본에 친화적인 만큼 서방언론에서 거의 비판되지 않는다. 터키의 레제프 에르도안 같은 경우에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철폐시키지는 않았지만, 거의 무력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그 통치기간인 지난 13년 동안 해고를 당한 비판적 기자만 해도 1863명에 이르고 수십명은 어용화된 사법부의 부당한 판결로 영어의 몸이 됐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잔존해도, 좌파 등 급진파나 쿠르드 민족운동가의 합법적인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타이가 그 남부에서 이슬람계 소수자들에 대한 유혈탄압을 가중시키고 있는가 하면, 터키는 쿠르드족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펴서 사실상 준내전의 상황을 연출시켰다. 타이나 터키가 다소 강경 권위주의의 경우에 속한다면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정권은 ‘연성’ 권위주의로 불릴 만하다. 매체에서의 ‘불균형 보도’(즉, 정부에 대한 비판)를 사법처벌하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켜도 대부분의 매체들의 순응주의적 태도로 굳이 그 악법을 사용할 필요도 아직 못 느낀다는 것이다. 타이나 터키는 소수자에 대한 유혈 전쟁을 진행하지만, 헝가리는 피난민들을 ‘공적’으로 지정해 그 입국을 무조건 불허한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실력자’ 통치에 ‘적’이 꼭 필요한 것이다.
세계체제 차원에서는 타이도 터키도 헝가리도 준주변부에 속한다. 즉, 제조업 위주의 산업경제를 가지고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의 수출에 의존하면서도 특히 금융부문 등에서는 핵심부(구미권과 일본) 외자에 종속돼 있다. 준주변부 국가 대부분은 최근에 신권위주의로 이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의 경제를 좌우하는 핵심부 국가들에서도 권위주의적 극우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빅토르 오르반의 헝가리는 트럼프가 생각하는 “위대한 미국”이나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당수인 르펜이 생각하는 “새로운 프랑스”의 청사진이 된다. 타자나 소수자 배제를 통한 “국민적 총화단결”, 좌파에 대한 강압적 무력화와 계급투쟁의 원천 차단, 국가주의적 “전통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공론장의 강압적 재편 등은 준주변부에서도 핵심부에서도 지배계급의 상당 부분이 지향하는 “새로운 질서”의 특징으로 거론된다.
준주변부의 상층에 속하는 한국은, 최근 준주변부 전체의 재권위주의화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이명박·박근혜의 민주주의 파괴를 국내적 현상으로만 이해하려 하지만, 사실 하나의 국제적 현상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정도의 차원에서 논하자면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파괴와 재권위주의화는 아마도 터키와 헝가리 사이의 중간적 수준에 해당할 것이다. 즉,
-비록 (아직까지?) 실전을 하지 않지만, 정권이 주도해온 대북 관계의 악화는 군사적 동원 분위기의 상시화를 통한 보수층 결집을 가능케 한다.
-비록 (아직까지?) 형식적 민주주의를 정지시키지 않았지만 국정원 선거 개입 사태나 통진당의 법적 해산이라는 노골적 폭거는 민주주의의 극적 형해화를 의미한다. 급진파의 일부가 국가 탄압을 당하고 주류 야당도 정보기관의 협조(?)까지 보장받는 여당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아무래도 ‘민주주의’로 명명하기가 힘들다.
-비록 (아직까지?) 표현 자유의 공간은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연세대 황상민 교수의 “생식기 발언”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그 해임 등은, 급진적 비판은 아니더라도 “최고 존엄”에 대한 그 어떤 “불경”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신권위주의 체제의 윤곽을 여실히 보여준다.
-비록 (아직까지?) 결사와 집회의 자유 자체가 철회되지 않았지만 각종 집회 주도자나 참석자에 대한 투옥과 벌금형 부과 등을 통한 부당한 탄압이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체포, 그리고 전교조의 법외노조화 등이 상징하는 극심한 반노동적 태도는 피치자들의 그 어떤 투쟁도, 나아가서 그 어떤 자율성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웅변적으로 과시한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1930년대의 그 흔했던 파쇼 정권들과 달리 형식적 민주주의의 “해골”은 남아도 그 생명이 꺼져가는 것은 타이나 터키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은 타이와 달리 최근 군부정변을 겪지 않았다 해도, 또 터키와 달리 국내 소수자들과의 열전을 감행하는 상황은 아니더라도 본질상 타이, 터키, 한국의 상황은 유사하다고 볼 여지는 있다.
1930년대 파쇼화돼 갔던 유럽과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민간 ‘운동’으로서의 파시즘의 상대적 결여다. 한국에는 어버이연합도 일베도 있지만, 그 전투성이나 동원 규모의 차원에서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고전적’ 파시즘과는 비교 그 자체가 (아직도?) 불가능하다. 1930년대 유럽의 파시즘은, 전통적 엘리트에 대한 신뢰를 잃은 극우적 중산층 중·하층의 대대적인 반좌파적이면서도 반엘리트적인 반동운동이었다. 한데 터키나 타이, 한국의 신권위주의 정권들은 그 나라들의 전통 지배세력들(대자본, 군부, 관료층)을 대변하면서 나아가서 핵심부 자본에도 매우 친화적이다. 박근혜 정권 같으면 국내외 재벌들의 정권이라 해도 어폐가 없으리라고 본다. 1930년대의 파시즘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반동운동’으로서의 측면도 있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신권위주의는 철저하게 ‘위로부터의 사회재편’에 해당한다. 신권위주의적 안보·경찰 국가가 복지 증진 등을 거의 하지 않은 채 기업의 세금을 깎아주는 등 기업 일변도의 의제를 관철시키는 것부터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기업들을 오히려 전체주의 국가에 종속시키려 했던 ‘고전적’ 파시즘과 사뭇 다른 태도다.
사실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야말로 ‘실력자 시대’의 기원과 의미의 이해에 관건이 된다. 터키도 타이도 한국도 1990년대 초반에 형식적 민주주의로 거의 같은 시기에 이행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이행이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에 그렇게까지 해롭지 않다는 기대심리가 기업계에서 팽배했다. 기업들은 구미권 자유주의 패턴대로의 ‘안정적 정국 운영’, 즉 자산계급 헤게모니의 안정적 공고화를 기대했으며, 지속적 성장 속에서 사내복지 등의 방식을 통해 적어도 일부 고숙련 노동력의 포섭, 즉 제한적이며 시혜적이지만 나름의 재분배 정책도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내수증진과 기업을 위한 ‘사회 안정화’에 기여하리라고 봤기 때문이다. 한데 1997~98년 아시아 경제위기를 지나 준주변부 신자유주의화가 본격화된 후에는 준주변부 국가 총자본의 계산은 확 달라졌다. 포화돼가는 세계시장에서 저임금 국가 제조업과 어렵게 경쟁하면서 떨어져가는 이윤율을 맞이하는 상황에서는, 준주변부 대기업들과 관료층들은 제한적 재분배가 아닌 신권위주의적 대내외 ‘적 만들기’, 동원 분위기 조성, 강압통치를 통한 ‘국민결집’을 노리게 됐다. 박근혜 정권이라는 정치 괴물은, 결국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한데 철권통치로는 반대자의 입을 당분간 막을 수 있어도 “헬 조선”에서의 삶에 지친 다수의 배를 채울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머지않아 신권위주의는 민중 분노의 새로운 폭발을 낳을 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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