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끝났다. 헛웃음 나는 시트콤,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 선정적인 리얼리티쇼를 한바탕 몰아 본 느낌이다. 출연자인 정치인들이 공천권을 두고 죽이네 살리네 욕지거리를 내뱉고, ‘옥새 들고 나르샤’ 할리우드 액션이 난무하고, 시청률이 떨어지자 긴급투입한 거물 배우가 시즌2 주연을 꿰차겠다고 고집하니 방송 중 하차하네 마네 시끌시끌….
사실 4·13 정치극의 원래 기획의도는 ‘민주주의’다. 장기침체, 고령화, 청년실업을 어찌할지 토론하고, 유권자들이 저마다 옳다고 믿는 해법을 대행할 정치세력을 선택하는 게 진짜 취지였다는 얘기다. 진박 감별이나 셀프 공천으로 날을 새울 게 아니라 한국판 양적완화, 경제민주화, 월 40만원 기본소득, 5시 퇴근법을 더 치열하게 논쟁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은 공천을 둘러싼 용쟁호투에 밀려 선거 막판에야 ‘반짝’ 조명을 받았다. 그나마도 주목을 많이 받은 건 집권여당의 ‘한국판 양적완화’ 정도일 것이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어 시중에 푸는 양적완화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유행하더니, 마침내 우리 선거판에도 상륙했다. 2012년 이래 7차례나 금리를 내렸지만, ‘돈맥경화’ 우려만 나왔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눈길이 공천에서 정책으로 옮겨가자 논쟁도 불이 좀 붙는 듯했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집권여당이 ‘장사가 된다’ 싶은 양적완화를 핵심 공약으로 격상하고, 정부도 ‘노코멘트’에서 ‘일리가 있다’로 기울자 전문가 집단은 급속히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총선 전 여론조사는 선거 판세를 너나없이 ‘여당 우세’로 점쳤다.
선거일이 임박한 어느 날 10명가량의 전문가에게 양적완화 관련 견해를 묻는 전화를 돌려봤다. 예상은 했지만, 당정청 교감론까지 도는 공약에 대해 절반 이상이 입을 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정권 부침이 심한 연구소의 전문가는 “이 정도 상황이면 우린 얘기 못합니다”라며 말을 잘랐다. 대기업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익명으로도 인용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참고로만 얘기하겠다”고 했다. 처신에 덜 얽매이는 대학교수들도 일부는 비슷했다. 누가 봐도 통화정책 전공자인 서울의 한 대학교수는 “잘 몰라서 얘기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또 다른 대학의 통화정책 전공 교수도 “예민한 시기에 특정 정당 공약을 거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한국은행이야 말할 것도 없다. ‘총재발 함구령’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돈이 흐르지 않는 ‘돈맥경화’를 뚫어보자는데, 말이 흐르지 않는 ‘말맥경화’에 막히는 느낌이었다.
결국 총선은 집권여당이 참패하는 ‘식스센스급 반전극’으로 막을 내렸다. 16년 만의 여소야대 정국에 양적완화는 “물 건너갔다”는 얘기만 듣는 겸연쩍은 처지가 됐다. 진짜 득실을 가늠해볼 ‘디테일’의 공개도 오리무중에 빠질 테니 아쉬울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 경제는 교과서에 정답이 나와 있지 않은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할 처지에 있다. 이럴 때일수록 광장의 논쟁과 소통을 통해 집단지성을 가동하는 게 절실하다. 하지만 수사·정보기관이 카톡방을 통째로 털어가고 언론인과 시민사회 민간인의 통신자료를 함부로 뒤적이는 세상이다. (최근 통신사에 알아보니, 수사·정보기관은 나한테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바쁜 정부기관의 주목을 받은 동료 언론인들의 활동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이러나저러나 말의 흐름을 감시하고 비판에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권력 아래서는 소통의 열매가 영글기 어렵다. 위기 앞에서 돈맥경화만큼이나 말맥경화가 위험한 이유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정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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