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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인분 교수 사건’의 교훈

등록 2016-04-19 19:21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원리원칙상 가장 참신하고 ‘선진적’이어야 하는 대학교나 학회는 역설적으로 권력관계의 차원에서는 ‘선진’은커녕, 봉건제도 아닌 고대 노예제에 차라리 더 가깝다. 노예주와 같은 절대권력이 일상적으로 통하는 토양 위에서는 ‘인분 교수’들의 재생산은 필연적이다.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 나서 이들은 대학원생과 강사 등의 (준)노예 인력들을 무보수 노동으로 착취할 수 있는 주된 논문 생산 주체로 부상하여, 각종 대형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대학 사회는 봉건농장과 착취공장의 결합물이 된 것이다.

작년에 세상을 놀라게 한 일 중의 하나는 ‘인분 교수 사건’이었다. 한 사립대 교수가 자신이 주도하는 학회에 취직시켜준 제자에게 상습적으로 폭행할 뿐만 아니라 노예와 같은 생활을 시키고 심지어 인분을 강제로 먹이는 등 각종 희귀한 폭력을 일삼았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교수에 의한 피해자 월급 미지급은 ‘일상’이었고, 교수의 다른 제자들도 폭행에 가담했다. 그 사건이 일으킨 흥분은 이미 가라앉았지만, 답이 없는 질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있는 오지의 군부대도 아닌, 도심 한복판의 학회나 대학에서 중세의 봉건 영주가 농노를 착취하고 폭행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왜 몇 년간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제자이자 동료를 고문하는 ‘지식인’들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인간이 어떻게 야수가 되고, 한 무리 인간들의 야수적 행동들을 사회가 왜 방지하지도 못하고 말리지도 못했는가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성선설·성악설을 넘어, 인간의 구체적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그 환경, 즉 무엇보다 개개인을 둘러싼 권력관계다. ‘나의 권력이 무한하다’는 느낌은 특히 남성들에게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를 촉진해 공격성을 부추긴다. ‘이러면 안 된다’, ‘이러면 너도 다친다’라는 내면의 경고 메시지가 들리면, 즉 뇌 속에서 공격성 충동 견제 장치들이 가동되는 경우라면 그나마 폭행·추행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장기적인 권력 중독은 뇌의 자제 기능을 보통 치명적으로 손상시킨다. 인간의 행동을 자제케 하는 뇌의 부분들이 특정한 상황, 예컨대 권력관계가 분명한 ‘밑엣사람’과의 상호작용의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 횡포를 부리는 일들은 결국 상습화되지 않을 수 없다. 즉, 장기간의 견제되지 않는 권력 행사는, 뇌 기능의 차원에서 본다면 마약과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몇 년간 그 누구의 감시도 통제도 받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다 보면 자아가 변질되지 않을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아직도 권력관계 그 자체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인간 사회로서는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없게끔 한다는 것이다. 모든 권력이 모든 층위에서 견제되고 상쇄되고 밑에서도 위에서도 통제받는 거야말로 현실적으로 인간다운 사회의 기초적인 전제조건이다. 문제는, 이 이야기들은 한국의 대학-그중에서 특히 사립대학-이나 학회의 현실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리원칙상 가장 참신하고 ‘선진적’이어야 하는 대학교나 학회는 역설적으로 권력관계의 차원에서는 ‘선진’은커녕, 봉건제도 아닌 고대 노예제에 차라리 더 가까운 것이다. 노예주와 같은 절대권력이 일상적으로 통하는 토양 위에서는 ‘인분 교수’들의 재생산은 필연적이다.

한국 기업가들도 ‘밑엣사람’ 폭행 등 각종 갑질로 하도 ‘유명’하지만, 그들의 권력을 미약하게나마 다른 주주들이나 노조들이 견제할 수 있다. 군은 오랫동안 각종 폭력의 온상으로 기능해왔지만, 징병제 국가인 만큼 군 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의 뜨거운 관심도 있고 장교의 극단적 일탈행위를 그래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는 군법 질서도 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은 아무리 폭군 체질이라 해도 ‘표’를 의식해야 할 때가 있다. 한데 ‘교수님’들 같은 경우에는 한국 사회의 그 어떤 ‘실력자’들보다 ‘자유롭다’. 사립대의 경우에는 해당 대학을 쥐락펴락하는 파벌과만 잘 지내면 만사형통이다. 서울의 일부 소위 ‘명문대’를 포함해서 한국 사립대학의 절반 정도는 교육부의 종합 감사를 개교 이래 한 차례도 받은 적이 없었다. ‘교수님’들과 대학을 장악한, 조폭성이 짙은 학내패권세력들이 ‘작은 왕국의 군주’처럼 군림해도 걸리는 게 없다는 이야기다. 최근 10여년 동안 일부 대학에서 조교 노조 결성의 시도들은 있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경우에는 없다. 대학원생 같으면 ‘교수님’에게 반발하는 것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행동이다. 결국 위에서도 밑에서도 그 어떤 견제를 받지 않는 ‘실세급 교수님’은, 성추행범이나 상습 폭언의 주인공, 악질 폭행범 내지 ‘밑엣사람’ 노동의 비양심적 착취자, 대필 강요범 등이 되는 게 과연 매우 쉽지 않겠는가? ‘교수님’ 집단의 극단적 권력화·귀족화가 결국 괴물들을 낳는 것이다.

‘인분 교수 사건’의 전개 과정을 한번 눈여겨보자. 가해자가 피해자를 노예화시키기 위해 그에게 던진 미끼는 바로 ‘교수 채용 가능성’이었다. 고분고분 굴고 굴종만 잘하면 나는 너를 기사의 갑옷 시종에서 진짜 기사로 만들어주겠다는, 중세 봉건 귀족이 그 시종에게 할 만한 종류의 묵시적 약속이다. 다른 제자들의 폭행 가담 동기도 크게 봐서는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본인들도 동료를 고문하는 과정을 통해서라도 ‘시종’에서 ‘기사’가 되고자 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개인적 예속 관계를 일정 수준 수용하지 않는 이상 한국 대학의 정규직 교원이 과연 될 수 있는가다. 공공기관인 대학의 교원 충원 과정이 사실상 공공성이 결여돼 있으며 ‘교수님’과 대학 관리자들의 마피아성이 짙은 사적 이해관계의 절충에 맡겨져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학회도 많은 경우에는 공공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잃어 사조직화되고, 특정 ‘실세’ 추종 집단으로 변질된다. 특정 개인이 봉건 영주의 노릇을 맡고 그 하수인이 가신처럼 행동하는 사조직은, 자연스럽게 폭행·폭언·추행부터 시작해서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되는 게 순리가 아니겠는가?

봉건 기사단인지 조폭인지 알 수 없는 사적 패거리로 전락한 ‘대학 사회’의 특징을, ‘교수님’뿐만 아니라 그 ‘교수님’ 밑에서 ‘인생의 지혜’를 깨쳐야 하는 젊은 사람들도 빨리 배우고, 어떤 경우에는 ‘스승’들을 일찍 닮아가기 시작한다. 몇 주 전에 보도된 ‘서울 명문대 악마 대학원생’ 사건을 기억하는가? ‘교수님’인 아버지의 ‘빽’을 믿고 ‘교수 아버지’ 없는 동기생을 폭행하면서 착취하고 노예처럼 부려온 한 대학원생이 붙잡힌 것이었다. 그의 범죄 수법도 ‘인분 교수’와 본질상 비슷했다. ‘나는 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수 자리에 오르면 너를 위해서 한자리를 마련해주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동기생을 괴롭히는 한편 사실상의 무보수 조교로 이용해온 것이다. 이런 유의 사건들을 보면 ‘교수 사회’가 사실상의 신분 세습이 가능한 유사 봉건적 카르텔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사회에서 사디즘 경향이 강한 현대판 귀족이 현대판 농노에게 또다시 인분을 먹이는 종류의 사형(私刑)을 집행하지 않을 거라고 보장이라도 할 수 있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아랫사람’들의 생살여탈권을 행사하듯 하는 절대군주와 같은 ‘교수님’이라는 괴물을 낳은 것은 결국 권위주의적 국가와 신자유주의의 한국 특유의 결합이다. ‘교수님’ 집단의 귀족화를, 박정희 독재가 이끌었다. 1977년에 강사들이 교원으로서의 지위가 박탈되는 등 교원 사회가 양분돼 분리통치책 적용의 대상이 됐다. 강사들이 ‘잡직’으로 분류되는 등 전임교수들에게 예속되는 동시에, 전임교수들은 보수도 높아지고 또 각종 교수 평가단 등 국가기구 참여 기회도 많아졌다. 정권이 주도해서 만들어낸 대학 내의 극도로 불균형한 권력관계는 결국 많은 전임들을 권력중독자로 만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 나서 이들이 경쟁 본위의 새로운 학계 구도에서 대학원생과 강사 등의 (준)노예 인력들을 동원할 수 있는 주된 논문 생산 주체로 부상하여, ‘아랫사람’들의 무보수 노동을 착취하면서 각종 대형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대학 사회는, ‘인분 교수’의 탄생이 가능한 봉건농장과 착취공장의 결합물이 된 것이다. 과연 이게 해방으로서의 계몽을 다수에게 해줄 수 있는 지식인 사회일 것인가? 과연 ‘인분 교수 사건’에서 대학·학계 민주화가 얼마나 시급한지 우리가 배울 수 없을 것인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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