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영화 채널 에이치비오(HBO)에서 <콘퍼메이션>이라는 영화를 제작, 방영했다. 1991년 미국 연방대법관에 지명된 클래런스 토머스의 성적 괴롭힘 사실을 증언한 법학 교수 애니타 힐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힐이 고발한 토머스는 여전히 연방대법관이며 영화는 현재까지도 정계에서 활동하는 많은 인물들을 실명으로 다룬다. 특히 현재 미국의 부통령인 조 바이든이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얼마나 무능하고 겁쟁이였는지 보여준다. 영화의 내용과 별개로 나는 다른 지점에서 놀란다. 토머스가 아직 현직에 있는데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어? 부통령을 저렇게 막 비웃어도 제작자들이 안전하구나! 하긴, 2008년 대선에 출마했던 존 매케인의 러닝메이트인 세라 페일린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영화 <게임 체인지>는 2011년에 나왔다. 등장인물은 역시 모두 실명이다.
작품의 검열과 마음에 들지 않는 관계자 경질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나라에 속한 사람이다 보니 이런 한심한 생각이 불현듯 들곤 한다. 문화예술에 대한 정치권의 권력 행사는 곳곳에서 꾸준히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한국의 표현의 자유가 제약받는 현실에 대해 분야별로 다루기까지 했다. 정직하지 못한 권력에게 통제와 검열은 필수다.
부산시는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빙벨>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사퇴를 강요하던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결국 재선임하지 않았다. 반면 대통령이 좋아하는 드라마는 촬영 세트장을 재건한다고 한다. 대통령이 칭찬하는 드라마, 대통령이 보고 싶은 전시, 그의 입맛대로 문화를 조율해야 한다. 나라의 문화공간과 문화행사가 권력의 놀이터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나라를 박씨 집안의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5년마다 다른 대통령이 자신을 대리하여 나라를 다스린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표현’과 ‘자유’는 모두 어려운 개념이다. ‘저항’은 표현과 자유의 핵심이다. 지속적으로 그 개념의 정의와 범위를 위해 싸워야 한다. 저항은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있다. 저항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표현도 자유도 그 의미가 무색하다. 현재 한국의 문화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권력이 문화와 예술을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고 있다면 예능방송과 광고 속에서 ‘혐오’는 오락의 기능으로 자리잡고 있다. 개그라는 형식으로 사회의 약자나 소수자를 향한 혐오가 아무 제약 없이 ‘웃음’을 유발하는 반면, 이러한 개그가 정작 풍자와 조롱을 통해 저항해야 할 권력을 향하지는 않는다. 한 예로 이제 ‘장동민’이라는 이름은 혐오 발언의 대명사처럼 들릴 지경이다. 이 사회에 필요한 말을 하려는 사람들의 입이 열심히 봉해지는 반면 마땅한 조처가 필요한 혐오 발언은 너무도 놀랍게 보호받고 있다. 보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저항할 대상이 무엇인지, 완전히 뒤바뀐 이 사회는 총체적으로 엉망진창이다.
현실에 이토록 장벽이 많아서일까. 한쪽에서는 문화적 타임머신을 타고 비교적 자유롭고 풍요로웠다고 여기는 그때 그 시절로 자꾸만 돌아간다. 97년, 94년, 그리고 88년까지 갔다. 정치적 민주화에서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전까지, 대중문화의 추억은 딱 그 사이를 맴돈다. 추억의 도돌이표 속에 갇힌 문화는 퇴보와 지체를 반복할 우려가 있다.
약자를 향한 혐오가 ‘정상화’되고 있으며 저항과 진실을 향한 갈구가 솎아내야 할 대상이 되고 있다. 명백히 ‘비정상’이다. 대통령이 좋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 나도 간절히 원한다. 서로가 생각하는 ‘정상’의 개념이 달라서 문제지만.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