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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일당 2만원 / 손아람

등록 2016-05-04 19:52수정 2016-05-04 19:52

“그녀는 내게 우익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먼지처럼 평범한 이들이다. 나는 그렇게 말했고 그녀는 나를 별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구절이다. 평범한 노인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탑골공원에? 알 수 없는 일이다. 종로 거리를 지름길로 가로지를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거기에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사회망을 반영하는 내 연락처에 기록된 65살 이상 노인의 전화번호는 다섯개 남짓이다. 그중 한 명은 1인 언론사의 편집장인 백발의 노인이다. 명함에는 취재기자와 논설위원의 직함도 적혀 있다. 그를 만난 건 지난 대선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 유세 때였다. 후보가 다녀간 광장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연히 동석한 그에게 춥지 않냐고 묻자 그는 임종하는 줄 알았어, 라고 대답하여 나를 웃겼다. 명절 인사로 단체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채팅방으로 유력 정치인들이 멱살잡혀 끌려왔다. 답신은커녕 경쟁적인 속도의 엑소더스가 벌어졌고 1시간 뒤에는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전화기를 꺼놓았을 기자 몇명만이 남았다. 그 풍경이 너무 외롭게 느껴져서 감히 그 채팅방을 나오지 못했다.

성장기를 보낸 지방 아파트 단지의 경비원도 노인이었다. 경비원들은 낮에는 정자 아래 모여 장기를 뒀고 밤 9시가 넘어가면 의자 등판을 뒤로 젖힌 채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올려 덮은 채 잤다. 단지 내 강도 사건이 발생한 뒤 경비원들의 불량한 업무 태도가 주민들의 입도마에 올랐다. 그 뒤로도 경비원들은 잤다. 다만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허리를 벌떡 곧추세우고 야간 자습 시간의 중학생처럼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정에 우편물을 가지러 갔다가 단잠을 깬 경비원을 진노하게 만든 기억이 난다. 이제 그 아파트에는 경비원이 없다. 지문인식 보안문이 꾸벅꾸벅 졸던 노인을 대체했다. 지문인식률은 형편없어서 종종 입주자가 내려와 문을 열어준다. 가끔 사라진 경비 노인들의 ‘평범한’ 삶이 어디쯤을 표류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양가적인 감정이다. 담요를 끌어안고 잠든 경비원보다는 입주자의 지문조차 못 알아보고 길을 열어주지 않는 보안문이 훨씬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버이연합이 일당 2만원을 받고 집회에 동원됐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정치적 신념을 돈으로 살 수도 있다. 안 될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하지만 그 대가가 2만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적 효과를 생각한다면 시장 논리에도 들어맞지 않는 금액이며, 이 나라의 건국과 보수에 이바지해온 어버이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결여된 산정이다. 나는 대학생 때 방송국 스튜디오에 앉아 박장대소해주는 아르바이트로 3만원을 받았다. 경력도 재능도 요구되지 않았지만 시급 3만원이 오가는 현장에는 노인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현장이 해소된 저녁 대치선 너머 어버이들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내 세계관이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너머로 달려가는 위험한 연설에 아무 토도 달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드리고 싶다. 헤어질 때는 가슴에 카네이션을, 호주머니에는 차비 하시라고 만원 지폐 두 장을 꽂아드리고 싶다. 다른 집회에서는 또 마주 노려보게 된다 해도, 나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가, 그 사회를 위협하는 자들의 권리마저 인정받는 곳이라는 사실을 굳이 언쟁으로 설득해야 할까? 2만원은 전의를 상실케 만드는 액수다.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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