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없는사회’가 자진해산을 선언하면서 그 상징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단체의 해산이 어느 정도 예상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단체는 ‘학벌 없는 사회’가 과연 어떤 사회인지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감성에 호소하면서 활동해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온 사람과 나오지 않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말은 의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도 의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로스쿨을 폐지하고 사법시험 제도를 되살려야 한다는 뜻일까? 아마 그런 말은 아닐 것이다. ‘학벌없는사회’의 주된 공격 대상은 이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처럼 비실용적인 학문 전공자들,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만 졸업장이 있다는 이유로 취업시장에서 특혜를 누리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특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기업의 주장이기도 하다. 기업은 진작부터 ‘데모만 하다 온 것 같은’ 아니면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다가 온 것 같은’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들의 ‘능력’에 의심을 품어왔다. 그래서 대학이 이들에게 부여한 졸업장이나 학점을 믿지 못하고 독자적인 평가체계를 개발하였다. ‘인성과 창의성을 우선시하는 열린 채용’을 표어로 내걸면서 말이다. 그 결과 대학도서관은 전공서적 대신 토익이나 삼성직무적성검사 기출문제집을 펼쳐놓은 학생들로 가득해졌다.
‘학벌없는사회’의 문제점은 학벌주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학을 나온 사람을 나오지 않은 사람보다 우대하는 것은 학력주의이다. 동문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은 연고주의이다. 대학들을 줄 세우고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을 차별하는 것은 서열화이다. ‘학벌없는사회’는 이 셋을 뭉뚱그려서 취급하였다. 하지만 이 셋은 작동원리가 상이하며, 어떤 부분에서는 대립한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양상은 학력주의가 약화되면서 연고주의와 서열화가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을 나왔느냐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더 중요해졌고(서열화), 평준화 이후 사라지는 듯했던 ‘고등학교 연줄’을 다시 따지기 시작했다(연고주의).
학력주의의 약화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처럼 특정한 전문직과 연결되지 않은 분야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하고 있다. 알다시피 서구에서 대학은 원래 전문직 종사자들의 동업조합이자 양성기관으로 출발하였다. 중세 대학의 핵심을 이루었던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각각 성직자, 법률가, 의사라는 전문직과 관련되어 있었다. 수사학, 철학 등의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는 예비 단계에서 일반교양으로 가르쳐지다가 나중에 독립적인 위상을 획득한 것이다. 현대의 대학들은 법학부나 의학부 못지않은 규모의 인문사회과학부를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인데, 이는 이 학부의 졸업장이 화이트칼라 직업을 얻는 자격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자동화와 전산화의 영향으로 화이트칼라 노동시장이 축소되면서, 인문학은 다시 ‘교양’의 수준으로 격하되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명칭의 대중화가 이미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다. 철학이나 문학은 언제부터인가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막연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마치 이 학문들이 개별적으로는 깊이 탐구할 가치가 없다는 듯이, 그것들의 이름이 조만간 교과과정편람에서 지워질 것을 예고하듯이 말이다.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다. 학교를 없애면 된다. 하지만 학교가 없다면 누가 우리의 자격을 판단하게 될까?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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