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3대 편집장을 지낸 월터 배젓의 말이다. 그는 1873년 출간한 <롬바드 스트리트>라는 책에서 화폐를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는 권력구조를 제안했다. 핵심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 제도이다. 중앙은행의 기능 중 하나인 ‘최종 대부자’라는 용어도 그가 처음 썼다.
서양에서는 화폐의 권위를 사회적 계약에 바탕을 둔 것으로 봤다. 모든 국민과 시장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존재 가치를 인정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모든 차별을 없애주는…”, “완벽하게 고르게 해주는…” 구실을 하는 경우에만 주권국가의 온전한 화폐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화폐의 권위가 더 지엄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우주는 둥글고 인간 세상은 네모나다’(天圓地方·천원지방)라는 우주론에 근거해, 바깥은 둥글고 가운데는 네모난 구멍을 뚫어 주화를 만들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뒤 ‘돈의 힘은 저 높은 곳에 있다’(貨權在上·화권재상)면서 그런 권위를 담은 종이돈 발행을 시도했다.
화폐 발행은 이처럼 동서고금을 통틀어 엄격하고 정교한 규범에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정치적 최고 권력자라도 화폐 발행권에 섣불리 기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권력 남용이며, 자칫 국민경제의 기초질서를 교란할 수 있다. 금리나 통화량의 조정은 전체 국민에게 이익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을 먼저 줘야 한다.
정부가 조선, 해운, 건설 등 부실 업종 구조조정을 위해 한국은행의 발권력까지 동원한 국책 금융기관 자본확충을 꾀하고 있다. 그런데 부실의 책임은 묻지 않은 채 자산 거품의 형태로 국민에게 부담만 떠넘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화폐의 권위가 도전을 받고 있다.
박순빈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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