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의 <강간>. 여성의 얼굴에서 눈은 가슴으로, 코는 배꼽, 입은 사타구니로 표현한 이 작품에 마그리트는 ‘강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정확하다. 시선과 목소리는 제거되고, 개인의 정체성도 지워진 채 ‘머리 없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몸뚱이. 여성의 몸은 처벌받는 몸이며, 남성의 욕망을 받아주거나 소유의 대상으로 나눠갖는 공공재다.
그동안 ‘~녀’들의 죽음을 수없이 놀려오던 언론은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자 남자의 기가 죽을까봐 어쩔 줄 모르고, 듣지 않아도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이 분노를 저지시키려고 애쓰며 할 말을 가르쳐준다. (남성의 여성)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말자고 할 때는 ‘남성혐오’라는 말을 아주 쉽게 선택하지만,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에 있어서는 혐오라는 말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를 죽였다. 조심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죽인 결과다. 여성에 대한 무시는 규범으로 정착했으며 여성은 무시당하는 규범에 적응해왔다.
여성 대상 범죄라는 말에서 그쳤다면 이 가부장제 사회의 반발심은 덜했을 것이다. 그것은 결과만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 대상 범죄의 밑바닥에는 여성혐오가 깔려 있다고 주장하면 난관에 봉착한다. ‘여자라서’ 죽은 사건이긴 하지만 ‘여성혐오는 아니어야’ 한다는 정답이 있다. 범죄자 개인을 넘어 이 사회의 ‘문화’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성차별적 의식과 여성혐오는 가부장제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개인의 범죄행위는 여성혐오 때문‘만’은 아닐지 몰라도, 그러한 범죄가 구성되는 요건에 여성혐오는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정신질환과 여성혐오를 분리하려 하지만 가해자가 구축한 언어는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여자들이 무시해서”라는 말을 그가 하는 이유는 ‘남자를 무시한 여성에 대한 처벌’에 사회적으로 관대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살해(femicide)라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한 다이애나 러셀에 따르면 ‘낯선 여성혐오자(misogynist strangers)에 의한 살해’도 여성살해의 종류에 속한다.
저항의 언어는 늘 진압당한다. 분노한 이들의 언어를 정돈시키려고 하는 이들은 누굴까. 사회는 여성억압을 제도화했으며, 언론은 수도 없이 여성을 조롱했으며, 그렇게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번식했다. 혐오의 정글이 너무 촘촘하여 뿌리를 찾는 길이 험하기만 하다. 이 혐오에 저항하느라 얽히고설킨 여성들을 ‘똑같은 혐오의 가해자’로 만들어 잘라버리는 ‘중립적인’ 태도는 혐오를 더욱 무성하게 자라도록 돕고 있다.
경험한 자의 목소리를 빼앗아 할 말을 정해주는 태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경험한 자의 구체적인 언어는 해석하는 자의 언어를 거치면서 많은 사실들이 탈락되고, 실질적 공포와 감정은 해석하는 자의 불쾌감 앞에서 좌절한다. 젠더 문제를 축소하고 계급 문제를 강조하며 가난한 남성과 여성 일반의 가짜 전선을 만들어낸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목소리’다. 억울한 죽음과 함께할 수 있는 최선의 연대는 ‘아직 살아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지난 3월5일 내가 현재 거주하는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여성 예술가들이 모여 위키피디아 편집에 참여했다. 지속적으로 말을 쌓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현재는 미래의 편파적인 목소리에 의해 왜곡된 채 남을 것이며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르네상스, 문예부흥기는 여성에게는 ‘부흥기’가 아니다. 여성은 마녀사냥 당하고 가정에 박혀 있어야 했다. 여성은 최초의 식민지였으며 최후의 식민지로 남아 있다.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디스팩트 시즌3 방송 듣기 바로가기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