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 이것이 싫다면 바꿉시다.” 피켓을 들고 찍은 남성들의 과감한 인증사진이 페이스북에 연달아 올라왔다. 그 모험적인 용기에 대한 어떤 인상을 형성하기도 전이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단호하고 차가운 평가를 내렸다. 그는 5월28일치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 ‘잠재적 가해자?’에서 “무지에서 나온 선의는 지배 세력의 관용과 성찰로 둔갑하기 쉽다”면서, “나는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는 문장이 “나는 성차별 구조에서 가해자의 지위에 있습니다”라는 급진적인 언명으로 정정되어야 한다고 썼다. 무지로까지 평가절하되어야 할 운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괄호를 열어두겠지만, ‘지배 세력의 관용과 성찰로 둔갑한 선의’란 표현에 두들겨 맞는 듯한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익히 알며 실천해온 규범을 묘사하는 구절 같았기 때문이다. ‘신사의 품격’이라 부를 만한 어떤 매너.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에서 남성 전체를 구제하려는 시도 역시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는 환상에서 그리 멀지 않다. 이 규범은 여성을 배려하는 태도라기보다 차라리 전통적 남성성의 마지막 보루에 가까운 것이다.
신사의 양보에는 물러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내가 신사라는 사실을 부정당하지 않는 선까지. 이 심리적 저항선은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인지하는 남성들조차 개별적인 성폭력 가해자를 구조에서 분리하여 소거하려는 유혹에 빠뜨릴 만큼 막강하다. 가해자는 특수범죄자로 쉽게 간주된다. 나와는 전혀 다르며, 표본적으로 ‘진정한 남성’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종종 성폭력 가해 남성을 교정한다는 명목의 폭행이 벌어지는데 그중에는 가해자 대리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도 있다. 교도소 수감자들도 성범죄자에게 똑같은 구분짓기를 시도하여 명예를 사수한다. 살인범마저 강간범을 싫어한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여성 살해’라는 눈앞의 현상에서 차별과 혐오의 논의로 넘어가는 길목에 정신질환이라는 의학적 장벽을 세운다. 이러한 재조준 과정에서 남성인 ‘나’를 향한 구조적 투사는 격렬하게 거부된다. 만화 <럭키짱>의 무소불위 남성 캐릭터들은 당돌한 여성을 ‘재수없는 계집’이라고 부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관대하게 편을 서주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거든!” 구조와 ‘나’ 사이에는 딱 그만큼의 거리가 있다.
작가가 된 이후로 내가 이야기에서 여성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조건반사처럼 항변했다. 내 이야기에서는 살인도 일어난다. 작가는 동의하기 때문에 반가치를 표현하는 게 아니다…. 부질없는 변명이다. 돌이켜보면 살인을 그릴 때와는 달리 나는 반여성적 가치를 다룸에 있어서는 딜레마의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았는데,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에 들인 시간은 정직하다. 종이 위의 활자로 떠다닐 때는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내 각본을 읽은 여자배우가 여성이 이야기에서 주변화되는 건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병폐라면서 ‘연기하기에 자존심 상하지 않는 캐릭터’를 써 달라고 주문했던 적이 있다. 자존심 상하지 않는 캐릭터가 뭐냐고 묻자, 그녀는 남자배우의 연기를 지켜볼 때 “나한테 저 역할을 줬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대답했다. 영화 <소수의견>에서 유리장 안에 박제된 것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배우들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신사적으로’ 배제당한 인물을 안간힘을 다해 연기하는 중이었다. 그때 작가인 내가 있던 장소가 바로, 성차별 구조에서 가해자의 지위였다.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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