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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구호가 엇갈렸다, 경찰도 헷갈렸다

등록 2016-06-10 20:16수정 2016-06-12 10:59

1985년 9월9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학원가에 침투해 반미 투쟁을 선동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22명을 검거해 이 중 19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난 양동화, 김성만, 황대권 등이 재미 북한공작원 서정균에게 포섭돼 간첩이 된 후 국내에 들어와 학생운동권에 공작금을 주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게 당시 안기부 발표 내용이다. 1985년 9월9일자 <경향신문>(석간) 1면. <한겨레> 자료사진
1985년 9월9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학원가에 침투해 반미 투쟁을 선동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22명을 검거해 이 중 19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난 양동화, 김성만, 황대권 등이 재미 북한공작원 서정균에게 포섭돼 간첩이 된 후 국내에 들어와 학생운동권에 공작금을 주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게 당시 안기부 발표 내용이다. 1985년 9월9일자 <경향신문>(석간) 1면.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찬수의 NL 현대사
(4) ‘예속과 함성’, 그리고 단재사상연구회
1984년 4월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세칭 ‘청량리 588’ 사창가 건물의 옥탑방에 학생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연세대 졸업생인 김성만(물리학과 75학번)씨와 정금택(당시 국민대 대학원생)씨, 김창규(당시 성균관대 3학년)씨 등이었다. 이들은 건물주에게 “자취를 하겠다”고 말하고 월세로 옥탑방을 빌렸다. 이 방에서 1980년대 엔엘(NL·민족해방) 운동의 주요 문건 중 하나인 ‘예속과 함성’이 탄생했다. 굳이 사창가에 방을 얻은 건 보안 때문이 아니라 “월세가 가장 쌌기 때문”이라고 김성만씨는 말했다.

옥탑방에서 타이핑 뒤 복사·제본

‘예속과 함성’ 집필은 김성만, 정금택, 김창규 세 사람이 각각 3분의 1씩 나눠서 맡았다. 정씨는 고교 시절 김성만씨로부터 과외를 받은 인연이 있었고 김창규씨는 정씨 소개로 김성만씨를 알게 됐다. 김성만씨는 “내가 1982년 미국 유학 시절 공부한 문헌들을 복사해서 83년 귀국할 때 갖고 들어왔다. 한-미 관계에 관한 영어와 일어 문헌들이었다. 이걸로 정금택, 김창규 두 사람과 다시 학습한 뒤 몇 개의 소제목으로 나눠 글을 썼다. 최종 정리와 수정은 내가 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운동권 팸플릿과 달리 ‘예속과 함성’은 거의 책 한권 분량(131쪽)이었다. 김씨 등은 옥탑방에 타자기와 복사기를 들여놓고, 원고를 타이핑한 뒤 복사하고 직접 제본까지 했다. 이렇게 500여부를 만들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이화여대·동국대 등 서울지역 6개 대학과 부산대·전남대에 몰래 배포했다. 김성만씨는 “주로 서클룸과 학생식당 등에 몇십부씩 두고 나왔다. 이화여대는 출입이 어려워서 학교 앞 레스토랑과 술집에 몰래 놓아두었다”고 말했다.

당시로선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해방 이후 한-미 관계를 ‘지배-종속 관계’로 자세하게 기술했다. 맨 뒤엔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만행이 영문으로 사진과 함께 수록됐다.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했다.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은 미국에 있다. 미국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고서는 이 짜증스러운 가난과 정치적 억압과 저질스런 문화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 우리나라의 기본적 모순은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간 모순이다.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이루려면 매판세력만을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되며 제국주의 세력과 싸워야 하고 미국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군부독재가 아니라 미국이 주적’이라는 주장은 새로웠지만, 파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학생들은 ‘예속과 함성’을 몰래 돌려 읽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운동 노선을 반독재 투쟁에서 반제 투쟁으로 전환한 학생운동권 그룹은 없었다. 1985년 전남대 삼민투 위원장을 지낸 강기정(공대 82학번)씨의 얘기. “85년 봄 무렵의 어느 날 아침, 학생회관 서클룸 앞에 이 팸플릿이 놓여 있었다. 2벌식 타자기로 친데다 복사 상태가 조잡해서 사진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내용 중엔 매우 자극적인 단어들이 있어 좀 눈에 거슬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전남대에서 이 팸플릿으로 운동의 방향이 달라지진 않았다.” 서울의 다른 대학도 상황은 비슷했다.

김성만씨는 “‘예속과 함성’을 처음 배포한 뒤 약 1년간 운동권의 반응은 없었다. 반미 무풍지대인 한국에서 이 팸플릿이 즉각적 반응을 일으킬 수는 없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김씨는 1985년 6월 안기부에 붙잡혔다. ‘예속과 함성’ 제작은 다른 사안과 교묘하게 결부되며 그해 9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포장돼 공식 발표됐다. 안기부는 당시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학원가에 침투해 반미 투쟁을 선동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22명을 검거해 이 중 19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김씨는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하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인 1998년 8월15일 출소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북한 쪽과 접촉한 적은 있지만 ‘예속과 함성’ 제작은 북한과 무관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도서관에서 다른 주제와 함께 주체사상을 연구한 적은 있다. 또 재미동포 권유로 헝가리를 방문해 북한대사관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다. 이건 내가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곳에서 북한 영화를 보고 토론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들에게서 조사를 받았을 뿐이다. 북한과 ‘예속과 함성’은 무관했다”고 김성만씨는 말했다.

도발적 팸플릿의 반향은 천천히, 그리고 학생운동 주류와는 멀리 떨어진 데서 나타났다. ‘예속과 함성’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 반미 투쟁을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는 새로운 사조가 학생운동권 내에 움트기 시작했다. 1985년 가을 서울대에서 결성된 ‘단재사상연구회’는 그런 대표적 사례였다.

1984년 김성만·정금택·김창규 3인
한-미 관계 ‘지배-종속’으로 규정
“민주주의 진정으로 이루려면
미국으로부터 해방돼야” 주장
안기부, ‘유학생 간첩단사건’ 포장

‘반미 투쟁’ 내건 새로운 운동 싹터
1985년 서울대 단재사상연구회 등
한국사회 자생적 첫 ‘NL 조직’ 등장
전통적 서클문화 한계 비판하며
기존 학생운동 주류와 대립 구도

팸플릿 ‘예속과 함성’을 쓴 김성만씨. 그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하다 1998년 8월15일 출소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팸플릿 ‘예속과 함성’을 쓴 김성만씨. 그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고 13년간 복역하다 1998년 8월15일 출소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고대 ‘5·9 각목사태’

1985년 9월 중순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중국집 대성각에 10여명의 서울대생이 모였다고 검찰 수사기록엔 적혀 있다. 서울대 본부서클(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비합법 ‘언더서클’과 구별해, 학교본부에 등록된 서클을 본부서클 또는 오픈서클이라 불렀다)인 고전연구회 소속 학생들이었다. 김영환(법대 82학번), 정대화( ) 등 4학년생과 김지연(약대 83학번) 배○○(법대 83학번) 등 3학년생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학생들은 이 자리에서 ‘단재사상연구회’라는 언더서클을 결성하기로 했다. 고전연구회 밑에 굳이 새로운 이름의 언더서클을 만든 건, 학생운동의 기존 노선을 바꿀 운동을 벌여나가자는 뜻에서였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한 인사(83학번)는 “그 무렵 학생운동은 반독재 투쟁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반미투쟁의 깃발을 들자는 주장은 신선했고, 옳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고 말했다. ‘단재사상연구회’(단사)란 이름은 김영환씨가 제안했다고 한다. 정대화씨는 ‘세계철학연구회’로 이름을 정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영환씨가 “초기엔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지만 나중에 아나키스트가 된 신채호 선생의 삶이 혁명가로 살다 죽기로 한 우리의 지향과 맞아서” 단재사상연구회란 이름을 제안했다고 검찰 수사기록엔 적혀 있다. 한국 사회의 자생적인 첫 ‘엔엘(NL) 그룹’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단사는 그 시기 학생운동의 성격을 바꾸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전연구회 멤버들은 단사를 결성하기 전부터 반미와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세우는 새로운 사조, 곧 NL-PDR론(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어느 정도 정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 구로구 시흥동의 배○○(법대 83학번)씨 아파트에서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배씨는 1986년 결성된 구국학생연맹(구학련) 핵심으로도 활동했지만 경찰 프락치로 지목돼 유학을 떠난 의문의 인물이다. 부산 출신인 배씨는 집안이 부유해 그 당시 지방 학생으론 드물게 아파트를 전세내 자취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배씨의 집이 단재사상연구회와 구학련 등 엔엘 그룹 모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 무렵 학생들 사이에 화제를 모은 ‘반제 민중 민주화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 ‘해방서시’)라는 제목의 팸플릿은 단사 그룹 작품이었다. 김영환씨가 글을 쓰고 정대화씨가 김정환 시인의 ‘해방서시’를 도입부에 붙였다. ‘우리는 대대로 푸르디푸른 하늘만을 섬기며 살고 싶었습니다/ 날새면 해노래 들판에서 호미 씻으며/ 우리는 대대로 흰옷에 흙 묻히고 맨발로 사는 순박한 백의민족이고 싶었습니다…’라는 시였다. 이 팸플릿은 한국 사회의 성격과 변혁운동 방향에 관해 학생운동권 주류가 갖고 있던 생각을 비판했다. “한국 사회는 미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신식민지 사회”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김영환씨는 “‘예속과 함성’이 이 팸플릿을 쓰는 데 영향을 줬다”고 나중에 검찰에서 진술했다. 정대화씨는 “신식민지론, 곧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은 안병직 교수의 저술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예속과 함성’이 이론적으로 영향을 준 건 별로 없다. 다만 정서적으로는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새로운 사조의 등장은 혼란과 갈등을 동반했다. 1985년 가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 주도로 학생 집회가 열렸다. 삼민투는 핵심 슬로건으로 민중 주도의 삼민헌법 쟁취를 내걸었다. 그런데 자유토론 시간에 본부서클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학생이 연단에 올랐다. 정대화씨였다. “우리 한반도 민중의 주적은 이 땅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이다. 우리 눈앞에 확연히 드러난 저 군부독재 정권도 결국은 미국의 괴뢰에 불과하다. 그런데 학생운동권이 이렇듯 현상에 불과한 군사독재 정권만 공격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집회에 모인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는 주장에 집회는 그걸로 끝이 나버렸다.

비슷한 상황은 다른 대학에서도 벌어졌다. 1986년 고려대에서 발생한 ‘5·9 각목사태’는 엔엘 사조를 둘러싼 학내 갈등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5월9일 고려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300여명의 학생들이 ‘민민투’(민족민주투쟁위원회) 결성식을 열었다. 식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이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몰려왔다. 이들은 연단 위로 올라가 자신들이 투쟁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쪽은 피디(PD·민중민주) 계열이고, 다른 한쪽은 엔엘 계열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 와중에 누군가 던진 각목이 연단 위로 날아와 총학생회장을 스치듯 지나갔다. 학생들 사이에선 몸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두 무리의 학생들은 각기 다른 구호를 외치며 교문 앞으로 행진했다. 학생들의 엇갈린 구호와 대립하는 모습에 경찰도 혼란스러웠는지 그날은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고 한다.

서클주의 청산 명분 내걸어

주도권 교체는 이념의 전파만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새로운 사조의 확산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요구했다. 엔엘 그룹은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으로 ‘아르엠오’(RMO·혁명적 대중조직) 건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수십년간 학생운동의 근거지였던 서클을 모두 해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서클주의 청산을 명분으로 학생운동권 주류의 운동방식에 도전했다. 그때까지 학생운동은 ‘패밀리’ ‘집’ 또는 ‘팀’이라 불리는 비합법 이념서클(언더서클. 공안당국에선 ‘지하서클’이라고 불렀다)이 주도했다. 인간적 유대감에 바탕을 둔 소규모 언더서클은 독재의 폭압적 탄압에 대응하기 위한 학생운동권의 최적화된 조직방식이었다.

1970~80년대의 서클 문화는 독특했다. 학생운동을 앞세웠지만 이념 조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선후배간의 끈끈한 유대와 공동 학습문화를 중시한 일종의 공동체와 같았다. 의리와 정에 기반했고 특유의 배타성을 띠었다는 점에서, 흡사 혈연과 출신지를 바탕으로 가족과 같은 결속력을 지녔던 뉴욕의 마피아 패밀리와도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둘 문제점이 드러났다. 큰 서클의 독단적 결정에 대한 작은 서클과 오픈서클의 반발이 커졌다. 배타적 운동 문화와 학번 중심의 일방적 명령 체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엔엘 그룹은 이 지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파벌주의 극복, 학번제 철폐, 운동에서의 반봉건적 문화 종식을 주장했다. ‘서클 해체’를 둘러싼 기존 학생운동권과 엔엘 그룹의 격돌은 이제 불가피했다.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 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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