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북한으로 송환된 비정향 장기수 이인모씨가 북한 쪽 인사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모습이 <조선화보>에 실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찬수의 NL 현대사
⑭ NL의 분화 - 통일운동 3
1993년 12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의 팩시밀리 편지를 받은 문익환 목사는 몹시 당황했다. 서울 수유리 자택으로 통일운동을 함께 하는 인사 몇을 불러모은 문 목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고 한다. 백인준 의장이 편지를 보낸 의도는 분명했다.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를 건설하려는 문 목사 구상에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1989년 봄 목숨을 걸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났던 문 목사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거 어떻게 해야 돼?” 문 목사가 묻자, 한 인사가 “그냥 계십시요. 북한이 팩시밀리로 편지를 보낸 건 이 내용을 공개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일단 논란을 더 키우지 말고 지켜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고 조언했다. 문 목사는 품이 넓은 사람이었지만 자존심은 강했다. 곧 백인준 의장 앞으로 답신을 썼다.
“역사의 발전과 함께 통일운동의 틀과 방식도 바뀔 수 있습니다. 남과 북, 해외는 각기 다른 처지에 맞게 독자적인 통일운동체를 되도록 크게 조직해내야 합니다.(…)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는 7천만 겨레의 통일 열망을 담아내고 통일세력들을 조직하는 데 범민련이라는 틀은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세 지역의 사정이 너무 달라 각 지역의 통일체들이 좀 느슨한 관계로 맺어져서 서로 구속을 덜 받으면서 하나로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통일운동은 ‘과거를 묻지 않는’ 운동
문 목사의 통일운동 구상은 두가지 점에서 범민련 고수를 주장하는 쪽과 결이 달랐다. 우선, 통일운동 대중화에 대한 믿음이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노래가 있는데, 통일운동이 바로 ‘과거를 묻지 않는’ 운동이다. 목사님은 통일운동이 민주화운동보다 훨씬 폭넓게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확신했다. 정부 인사나 재벌기업도 통일운동을 함께 할 수 있다고 봤다. 통일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뒤에 북한 및 해외동포와 삼발이처럼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둘째로, 김영삼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대중적 통일운동’을 벌여나가려면 정부와 어느 정도 타협하고 협력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초기에 한완상 서울대 교수를 통일부 장관에 앉히고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김창수 원장은 “목사님은 김영삼 정권과 통일운동에서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야 내부에선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범민련 지지 인사들은 반정부 투쟁으로서 통일운동의 성격을 중시했다. 김영삼 정부와 대화하는 건 개량주의라고 몰아붙였다.
이미 1992년 무렵부터 재야 내부에선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이 본격화했다. 세는 범민련보다 새통체 쪽으로 쏠렸다. 문 목사를 도와 새통체 결성에 참여했던 조성우 전 평화연구소장은 “재야의 절대다수가 새통체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범민련을 지켰던 민경우(1995~2002년 범민련 사무처장)씨도 “절대다수까진 아니지만 어쨌든 다수가 새통체를 지지했던 건 맞다. 그때는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엔엘 핵심인)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도 새통체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민혁당이 북한 공식 입장과 배치되는 ‘범민련 해체’를 주장했다는 부분은 흥미롭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민혁당은 당시 북한이 승인한 남한의 가장 큰 지하당이었다. 북이 보낸 공작원이 아니라 남쪽의 엔엘(NL)주의자들이 스스로 결성한, 아마도 해방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자생적 전위당이 민혁당이었다.
민혁당 핵심은 1986년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씨였다. 김씨는 1991년 몰래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민혁당 결성을 주도했다. 민혁당에서 통일운동을 담당했던 이는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간사를 지낸 홍진표(현 <시대정신> 편집인)씨였다. 홍씨는 “나는 민혁당 중앙위원장인 김영환씨하고 ‘범민련을 해산하고 새통체를 결성하는 게 옳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김영환씨가 이런 입장을 북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김영환씨는 1992년 말~93년 초에 ‘범민련 해체 의견’을 북한 사회문화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김씨의 얘기는 이렇다. “그때까지 통일운동에 관해 북의 공식 입장이 내려온 건 없었다. ‘범민련이 동력을 상실했으니 해산하고 대중적 통일운동체를 만드는 게 낫다’고 북쪽에 얘기했다. 그런데 사회문화부에서 ‘그것은 다른 부서(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담당하는 사업이니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하기 어렵다’는 답이 내려왔다. 내가 재차 범민련 해산을 주장하자 ‘수령님 교시사항이라 어렵다’는 취지의 답변이 다시 왔다. 그때까지 사회문화부가 내 제안을 명백하게 거부한 적이 없어 좀 놀랐다.” 이 사안은 민혁당 내부 노선투쟁을 본격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규율이 생명인 전위당에서 상부 지시에 정반대의 정치적 태도를 취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민혁당 내 상당수는 김영환씨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씨와 김씨를 따르는 당원들은 본격적으로 전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문 목사, 편지 쓴 다음날 숨져
처음엔 어떻게 통일운동을 벌여나갈지, 노선의 차이였다. 그러나 갈수록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범민련 쪽과 새통체 쪽의 대립과 갈등이 극심해졌다.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은 “새통체 쪽이 다수를 점하면서 패권적 모습이 나타났다. 노선으로 설득하기보다 위압적으로 참여를 종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런 게 일선 단체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반대로 범민련 쪽에선 말로써 새통체 인사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말했다. 새통체 추진 인사들을 ‘미 중앙정보국(CIA) 프락치’라거나 ‘안기부 첩자’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말들이 나돌았다. 문 목사를 따라 새통체에 가담했던 홍진표씨는 “민혁당 당원인 나한테도 ‘안기부 프락치’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양쪽이 함께 모인 통일 관련 모임에선 욕설과 함께 재떨이가 날아가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해외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베를린에 사무국을 둔 범민련 해외본부(의장 윤이상)에서 보낸 팩시밀리 편지였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의장은 “1994년 1월17일쯤이었다. 발신인은 범민련 해외본였는데 수신인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용은 ‘새통체를 추진하는 사람 중에 김영삼 정부 프락치가 있다’는 거였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북한에서 문익환 목사가 프락치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어쨌든 그 편지를 보고 우리(새통체 쪽)는 몹시 분개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1월17일 밤 범민련 북쪽본부 백인준 의장과 해외본부 윤이상 의장, 남쪽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자신의 통일운동 구상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편지였다. “제가 범민련 남쪽본부 준비위원장직을 물러난 건 통일운동을 그만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묶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북쪽과 해외 통일운동세력과 손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 사상과 이념의 좌우를 거론하지 말아야 합니다. 좌도 우도 다 같이 한겨레가 되어 분단의 장벽에 온몸 부딪쳐 가야 합니다. 7·4 (남북) 공동성명을 받아들이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지지하는 모든 개인이나 단체는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편지는 발송되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날(1월18일) 문익환 목사는 숨을 거뒀다. 문 목사의 마지말 날을 그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씨는 이렇게 썼다. “대뜸 나서서 중상공격을 시작한 것이 범민련 해외본부의 ○○○이었소이다. ‘문아무개는 김영삼 정권과 어울려서 흡수통일을 획책하고 있는 스파이다…’ 밑도 끝도 없는 뜬소문이 삽시간에 서울로 평양으로 돌더니 범민련 독일지부로부터 발신된 전문이 문 목사에게까지 도달하였던 것인데, 이 한 통의 전문이 문 목사에게 죽음을 불러온 것이외다. 1월17일 밤 문 목사는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평양의 백인준 의장에게 편지를 썼소이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처럼 집을 나온 문 목사는 늘 따라다니는 제자들과 함께 갈빗집에서 점심을 드시면서 범민련 소속인 진관 스님에게 화풀이를 좀 하신 것이 아니오이까. “내가 그래 스파이냐?” 그 말을 세 번 되풀이하는 사이에 입에 든 음식이 식도가 아니라 기관으로 넘어가는 오연(誤嚥)을 일으킨 것인데, 이것은 연로한 분이 감정이 격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고 어느 의사가 일러주더이다. 제자들이 구급차가 아니라 택시로 연세대 병원으로 모시고 갔으니 사람들 틈에 끼어 순번을 기다릴 수도 없고 초주검이 된 문 목사가 자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지요.”(<한겨레> 2009년 12월9일치 정경모의 ‘길을 찾아서’)
문 목사가 구상한 ‘새로운 통일운동체’는 그의 사후인 1994년 7월2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 결성으로 가시화했다.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민련의 후신) 가입단체의 다수가 민족회의에 가담했다. 통일운동 내부의 갈등은 1995년 8·15 행사에서 적나라하게 표출됐다. 8월15일 민족회의 주최로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해방 50주년 민족공동행사’ 도중에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대거 행사장을 빠져나가 서울대에서 제6차 범민족대회를 별도로 열어버렸다. 조직과 행사가 완전히 둘로 갈라진 것이다.
일반 국민 호응 얻은 ‘연희동 진격투쟁’
20여년이 흘렀다. 그때 민족회의와 범민련으로 나뉘어 대립했던 통일운동 핵심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민족회의에 참여했던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2000년 6·13 남북정상회담 이후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결성에서 보듯이 지금은 정부당국의 통일운동 참여가 당연시된다. 하지만 90년대 중반까진 ‘정부가 통일운동의 한 주체’라는 인식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문 목사님이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경우 전 범민련 사무처장의 평가는 솔직하고 명료했다. “우리(범민련)는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국 사회가 여전히 식민지반자본주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봤고, 그러니까 민족해방운동으로서 통일운동 위상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통일운동은 정부가 허용하는 합법 공간 위에서만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얻었던 것 같다. 정부 탄압에 아랑곳없이 스스로 발화하는 반독재 투쟁과는 성격이 달랐다. 합법단체가 아닌 범민련은 대중성을 강화하기 어려운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때 민족회의를 인정하고 연대했어야 했다. 너무 경직돼 있었다. 통일운동의 분열이 결국 1996년 8월 연세대 사태를 초래했다는 반성을 한다.”
사실 1960년대 이후 한국 운동사에서 광범위한 대중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다. 1996년 8월 연세대 범민족대회에 수만명의 학생을 결집할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투쟁 덕분이었다. 1995년 하반기 한총련은 전두환·노태우 구속을 촉구하는 ‘연희동 진격투쟁’을 벌여 일반 국민과 학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이것이 그해 말 치러진 총학생회 선거에서 엔엘 계열이 전국 거의 모든 대학 학생회를 장악하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연세대에 모인 수만명 학생의 격렬한 ‘통일투쟁’은 운동의 확산이 아니라 고립으로 끝났다. 그런 점에서 1986년 6월항쟁 시기에 대중적 정당성과 지지를 획득했던 엔엘 사조는 ‘반미’와 ‘통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순간 한계에 직면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는지 모른다.
1994년 1월22일 겨레장으로 치러진 늦봄 문익환 목사 장례식 운구 행렬이 대학로 노제를 마친 뒤 장지인 경기도 남양주군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익환 목사가 1994년 1월17일 밤 자신의 통일 구상을 담아 범민련 북쪽본부 백인준 의장과 해외본부 윤이상 의장, 남쪽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 앞으로 보낸 편지. 문 목사는 편지를 쓴 다음날 숨을 거뒀다.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