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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은유로서의 질병 / 김현경

등록 2016-06-13 19:25수정 2016-06-13 19:25



<은유로서의 질병>은 수전 손태그가 유방암 판정을 받은 지 2년 뒤인 1978년에 펴낸 책이다. 암 투병을 계기로 그녀는 암이라는 질병이 죽음의 은유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암은 사형이 선고되듯 ‘선고’된다. 게다가 19세기에 ‘죽음에 이르는 병’을 대표했던 결핵과 달리, 암이 초래하는 죽음은 더럽고 끔찍하다. 결핵에는 언제나 낭만적인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결핵은 시인과 예술가들의 질병이자, 습한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태양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보헤미안의 병이었다. 결핵 환자는 고뇌와 열정으로 스스로를 ‘소모한다’. 암에는 이런 고상함이 없다. 결핵이 (신체기관들의 위계에서 위쪽에 있는) 폐를 주로 침범한다면, 암은 자궁, 대장, 전립선 등 말하기도 부끄러운 온갖 부위로 퍼진다. 19세기에는 성격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관념이 있었는데, 정열의 질병인 결핵과 반대로, 암은 냉담하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이 주로 걸린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병을 단순히 병으로 보지 않고 거기서 그 이상의 의미를 찾는 것은 투병으로 지친 환자들에게 병을 둘러싼 상징들과의 싸움이라는 또 다른 짐을 안긴다. 암과 결핵이 평범한 질병으로 바뀐 오늘날, 이러한 상징의 짐을 가장 무겁게 느끼는 이들은 아마 정신질환자들일 것이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정신질환은 악 자체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평소에는 이성의 통제 아래 있었던 인간성의 어두운 면이 어떤 계기로 폭발하면서 정신질환이 된다는 식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이러한 통속적 관념을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이성이 악을 누르는 데 실패할 때마다 악의 힘은 점점 커진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이런 통념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확인할 기회였다. 박경신 교수는 정신병자도 혐오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면서, “혐오는 두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므로 당연히 두뇌에 문제가 생기면 혐오는 더 증폭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신질환자는 보통 사람보다 특별히 혐오감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혐오감뿐 아니라 분노와 공격성 등, 우리의 무의식에 숨어 있던 다양한 악을 증폭된 형태로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두뇌 고장에 의해 증폭되는 것은 주로 인간성의 어두운 면일 테니 말이다. 한편 이나영 교수는 “이 사건은 성차별 사회에서 여성을 일상 속에서 무시해온 남성들의 무의식적 식민지적 행위”라고 단언하였다. 즉 정신질환자의 존재는 집단 무의식 속에 잠재된 악을 표출하는 통로라는 것이다.

이런 발언들은 정신병자는 우리 모두가 조금씩 가지고 있는 악을 유난히 많이 가진 사람이고, 정신병은 바로 그러한 과잉의 결과라는 생각, 즉 정신병은 악 자체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질병은 여기서 은유로 바뀐다. 피의자는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만이 아니라 병에 걸렸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 단, 예외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표본으로서, 모든 남자들을 대표해서 말이다.

하지만 정신질환자는 망상이 심해져서 병이 난 게 아니라, 병 때문에 망상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진짜 망상과 은유로서의 망상을 구별해야 한다. 정신질환으로 인한 망상은 약을 먹으면 없어진다. 반면 혐오범죄의 원인인 “남성들의 집단적 망상과 분열증”(이나영)은 약물로 치유되지 않는다.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뇌는 우리의 영혼이 거주하는 장소이지만, 의학적 관점에서는 하나의 장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장기들과 마찬가지로 뇌도 병에 걸린다. 정신병은 그저 병일 뿐이다. 거기에 너무 많은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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