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말~86년 초 엔엘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표방한 그룹들은 당시 학생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언더서클’이 학생운동의 분열과 사상투쟁의 근원이라고 비판하며 서클주의 청산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80년대 서울 시내 대학가에 나붙은 수많은 대자보. 연합뉴스
“1985년 말 송주명(정치 82학번)과 이○○(사회 82학번)는 자신들이 지도하던 85학번 박○○, 정○○, 손○○ 등을 교내 사대 식당으로 불러냈다. 웬일인지 두 사람은 평소와는 다르게 트렌치코트에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85 후배들은 속으로 ‘선이라도 보나’ 하는 생각에 웃으려는데, 선배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고 웃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제 집(서클)은 해체된다. 더 이상 집으로 모이는 일은 없을 거다.’ 박○○은 ‘이게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가’ 했다. ‘도대체 왜 해체하는데요?’ 후배들의 질문에 송주명은 배경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서울대 서클 전체에 수사가 들어와서 보안상 이유로 해체하기로 했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걸로 해체 절차는 간단히 마무리됐다.”
서울대 농촌법학회(농법)는 2012년에 펴낸 ‘서클 50년사’(고난의 꽃봉오리가 되다)에서 서클 역사의 종지부를 찍던 날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고 서클 해체에 대한 선배들의 아쉬움을 적었다. 이 글의 내용은 부분적으론 사실과 다르다. 수십년 동안 학생운동 근거지 구실을 했던 서울대 이념서클들이 1985년 말~86년 초에 모두 해산한 건 맞다. 그러나 선배들이 해산을 주도하고 후배들이 반발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송주명씨는 “나는 그때 수배 중이라 학교에 없었다. 86년 봄인가 학교에 가보니 이미 서클이 해체돼 있었다. 황당했다”고 말했다. 사실 거의 모든 서클에서 해체를 주도한 건 후배 그룹이었다. 그 흐름의 중심엔 엔엘(NL) 그룹이 자리잡고 있었다. 첫 엔엘 그룹인 고전연구회 산하 ‘단재사상연구회’가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 주요 대학 서클을 해체하는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전통적인 학생운동 주도세력이었던 서클의 해체를 통해서, 엔엘이라는 새로운 사조는 운동권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틀어쥐었다.
80년대 학생운동 근거지 ‘언더서클’
‘패밀리’·‘집’ 이름으로 세미나 활동
총학생회·단과대 지도책 주로 맡아
서울대 ‘단사’, “종파주의 온상” 비판
대학가 서클 해체 신호탄 쏘아올려
수십년 전통 ‘서클문화’ 급속히 소멸
NL 흐름 급속한 확산에 결정적 역할
“대중성 확산 계기” 평가 있으나
학생운동 재생산 구조 무너뜨리고
토론과 비판 기능 없앴다는 반론도
‘언더-오픈’ 갈등도 한 배경
그 무렵 서울대에선 ‘5대 패밀리’니 ‘8대 패밀리’니 하는 메이저 이념서클이 학생운동 구심점 역할을 했다. 엔엘 그룹 등장 이전, 엠시(MC: Main Current의 약자. ‘주류’라는 뜻)와 엠티(MT: 민주화투쟁위원회 약자인 ‘민투’에서 따온 말. 선도투쟁과 전위조직을 강조했다)라는 두 개의 흐름이 치열하게 이론투쟁을 벌이며 대립했다. 엠시 쪽의 메이저 서클로는 농법(농촌법학회), 후경(후진국경제연구회), 농경(농업경제학회), 경법(경제법학회), 국경(국제경제학회) 등이 꼽혔다. 엠티 쪽에선 애플(사회과학회. 약칭이 ‘사과’라 애플이라 불렀다), 게이트(대학문화연구회. 약칭이 ‘대문’이라 게이트라 불렀다), 아카(흥사단아카데미의 언더서클) 등 3개가 메이저였다. 서클 이름에 ‘후진국’이나 ‘농업’ 같은 복고적 단어가 붙은 건 이들이 대개 1960년대에 처음 결성됐기 때문이었다.
이념서클은 저항성이 강한 독특한 조직이었다. ‘패밀리’, ‘집’ 또는 ‘팀’이라 부를 정도로 선후배 간 인간적 유대가 매우 강했다. 정기적인 세미나를 통해 토론과 사회과학 이론 공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 이후,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념서클은 정부 탄압을 피해 비공식적 형태로 활동했다. 그래서 학내에선 ‘언더’라고 불렀고, 공안당국은 ‘지하서클’이라 명명했다. 메이저 언더서클은 구성원이 100명에 가까울 정도로 규모가 컸다. 1984년 학원자율화 이후 학생운동 중심이 서클에서 학생회로 이동했지만,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지도책(포스트)은 여전히 주요 언더서클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맡았다.
엔엘을 표방한 고전연구회(단재사상연구회) 그룹은 이런 서클 체제에 정면 도전했다. 서클이 학생운동 분열과 도를 넘은 사상투쟁의 근원이라고 비판했다. 서클주의를 청산하고 오직 운동의 헌신성만으로 무장한 단일한 학생조직(RMO·혁명적 대중조직)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1985년 말~86년 초의 겨울방학을 거치면서 학내의 모든 언더서클이 자진 해산했다. 그해 4학년이 되는 83학번들이 변화를 주도했다. ‘후진국경제연구회’ 회장 이병호씨(서울대 국문 83학번)는 “서클이 종파주의 온상이라고 엔엘 쪽에선 봤다. 어떤 소그룹도 안 된다는 게 엔엘 입장이고 그게 옳다는 게 대세였으니까 우리도 해산을 결의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때 학내 분위기가 그랬다”고 말했다. 단재사상연구회에 속했던 김관영씨(서울대 신문 84학번)는 “한쪽에선 상당히 우려하는 분위기도 있었는데, 겨울방학 때 갑자기 빠른 속도로 (서클 해체가) 퍼져 나갔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수십년간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서클 문화’가 종지부를 찍는 데는 수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운동의 주도권이 엔엘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1985년 서울대 단과대학 포스트를 맡았던 한 인사(82학번)는 이렇게 말했다. “엔엘의 태동과 확산엔 언더서클과 오픈서클(대학본부에 등록한 서클)의 미묘한 갈등 관계가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 그 무렵 오픈서클은 학생운동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사조가 주변부에서 태동해서 운동의 주도세력까지 교체해 버렸다. 물론 이게 (엔엘 확산의) 결정적 이유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전복은 역사적으론 종종 볼 수 있는 일 아닌가.” 김영환씨와 함께 단재사상연구회를 이끌었던 정대화씨(나중에 구학련 중앙위원장을 지낸다)는 “그때 서클 해체를 우리가 주도한 건 맞다. 서클 방식으로는 절대 대중운동을 확산할 수 없다고 봤다. 이것(서클 해체) 때문에 논란도 많았고, 욕도 많이 먹었다”고 말했다.
80년대 대학가에는 ‘패밀리’, ‘집’ 또는 ‘팀’이라 불린 여러 언더서클이 존재했다. 이들은 토론과 사회과학 학습을 통해 학생운동의 재생산에 커다란 구실을 했으나, 공안당국은 이들을 ‘지하서클’이라 부르며 탄압했다. 경찰이 ‘불온서적’이라고 공개한 당시 대학가 사회과학 서적들. <한겨레> 자료사진
“전공만 남기고 교양학부 없앤 꼴”
비판은 주로 서클에 애정을 가진 선배들로부터 제기됐다. 하지만 엔엘계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 김영환·정대화씨와 함께 초기 엔엘 운동 정립에 핵심 역할을 했던 하영옥씨(법대 82학번)는 그 무렵 방위 복무 중이라 단재사상연구회 활동에 직접 개입하진 않았다. 하씨는 “나는 서클 해체에 반대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영환씨가 학생운동에 남긴 잘못 중 하나가 서클 해체라고 본다. 레닌이 서클주의를 비판하면서 볼셰비키당을 건설한 걸 본떠서 서클 해산을 추진한 건데, 서클이 사라짐으로써 학생운동의 재생산 구조가 무너졌다.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 모든 대학이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1990년대 이후 학생운동 쇠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단재사상연구회 회원이었고 서클 해체 당시 고전연구회 회장이던 김관영씨는 다른 측면에서 서클 해체를 비판했다. 김씨는 “서클 해체 이후 엔엘로 (학생운동이) 너무 확 쏠려버렸다. 엔엘의 실체와 지향점에 대해선 논의할 부분이 사실 많다. 서클이 토론과 비판의 장이었는데 서클 해체와 함께 그런 기능이 사라져버렸다. 엔엘 등장 이후 학생운동의 토론 수준을 보면 과거보다 많이 약화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진경씨(서울대 사회 82학번,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저자)는 서클 해체가 운동권에 끼친 영향이 훨씬 깊고 심각했다고 말했다. “서클은 대학으로 치면 교양학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다양한 운동을 위한 기본 자질을 기르는 곳이었다. 여기서 자라난 학생들이 나중에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서클 해산은 전공만 남겨놓고 교양학부를 없앤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다른 사회운동의 풀(저수지)도 말라버렸다. 또하나, 서클이 갖는 강점이 있다. 서클은 느슨한 조직이고, 즐기면서 운동을 하는 조직이었다. 유연하고 자유로웠다. 그런데 서클 해체 뒤 이를 대신한 엔엘 조직들은 너무 경직됐다. 대표적인 게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다. 일사불란함과 목표만 중시했고, 그걸 유지하기 위한 권위를 강조했다. 이런 조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신입생들은 점점 더 자유분방해지는 상황에서, 딱딱하고 목표 일변도의 조직이 외면받는 건 당연한 이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전체 운동의 급격한 쇠퇴엔 1986년의 서클 해체가 자리잡고 있다.”
‘언더’와 ‘오픈’의 미묘한 갈등이 엔엘 확산의 배경이 된 점은 고려대도 흡사했다. 그 무렵 고려대 역시 언더서클과 오픈서클(본부 등록서클)로 이원화돼 있었고, 1984년 학원자율화 이후엔 단과대학과 학과에 공식 학회가 만들어져 활성화됐다. 일부 학생은 언더서클과 학회에 중복 가입했지만, 상당수 학생은 학회에만 가입해 이곳에서 학습하며 학생운동 활동가로 성장했다. 고려대에서도 시위 조직과 유인물 배포 등 운동의 주도권은 언더서클이 쥐었다. 언더에서 결정된 사항이 학회나 본부서클로 전파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학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이곳에서 활동하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언더와 학회 출신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패기 시작했다. 당시 학회 활동을 주도했던 한 인사(정경대 82학번)는 “언더서클에서 성장한 학생은 이론적 강점이 있는 반면, 오픈서클이나 학회에서 성장한 학생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졌다. 또 언더 출신들이 괜히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학회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몇몇 언더서클이 패권적 행태를 보인다며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고대 오픈서클 연합체 ‘문정’
그런 와중에 ‘린치 사건’이 터졌다. 단과대학 학회에 속한 81학번 선배가 ‘학회에 가입해 있으면서 왜 언더서클 지시를 따르느냐’며 82학번 후배를 추궁하다가 이 후배의 팔을 부러뜨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학회 중심의 오픈서클과 언더서클 사이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학회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1985년 단일한 비합법 서클 ‘문정’을 만들었다. 기존 언더서클에 대항하기 위한 오픈서클의 연합체 형식이었다. 주로 문과대와 정경대 출신이 많아 이름을 ‘문정’이라 지었다. ‘문정’이 고려대에선 엔엘 확산의 구심점 노릇을 했다. 1986년 초 서울대 정대화씨와 만나 엔엘의 대학연합체 구성을 논의했던 조혁씨(나중에 반미청년회 회장을 지냈다)도 ‘문정’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조혁씨는 “문정은 스스로 급진화해 (‘반독재 투쟁’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이미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서울대 구학련과 연결되면서 엔엘 이론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1987년 방위 복무를 마치고 서울대에 복학한 하영옥씨는 자신이 몸담았던 고전연구회가 사라진 걸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고전연구회는 산하에 단재사상연구회(단사)란 언더를 두고 엔엘 확산을 주도했던 본부서클이다. 고전연구회 역시 1986년 6월께 공식 해산을 결의했다. 그때 회장을 지낸 김관영씨는 “학내 분위기를 다 알고 있었으니까 (해산에) 반대는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중에 복학한 하영옥 선배가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데 고전연구회를 재건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논의를 하다 88년쯤 고전연구회를 부활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고전연구회는 창립 40주년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다. 졸업생과 재학생 40여명이 참석했다. 수십년 전통의 이념서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정작 서클 해산을 주도했던 엔엘 그룹의 서클은 살아남아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 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