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기차는 예고도 없이 한나절을 연착한다. 역 앞 광장은 난민 캠프를 방불케 했다. 아밋은 맨땅에 뒹굴며 잠자던 내 옆자리 소년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습진약을 구하려고 1천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에서 왔다. 간단한 대화를 나눈 뒤 우리는 스마트폰을 빼들고 바로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또래의 한국 아이들처럼 그는 자기 계정에 최신 음악과 할리데이비드슨 오토바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귀국한 뒤 아밋의 메시지를 받았다. 국제우편으로 습진약을 몇 통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파키스탄의 엔지니어 자베드 역시 내 페이스북 친구다. 그는 이태원에 위치한 파키스탄 레스토랑의 식자재 공급선을 뚫어줄 수 있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난색을 표하자, 그는 취업비자를 얻을 수 있도록 아예 그 레스토랑에 자신을 취직시켜 달라고 졸랐다. 또 다른 페이스북 친구인 에티오피아의 아이티(IT) 기술자 투마이는 박사학위를 따면 삼성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했다. 요즘 에티오피아에서는 도로와 전화가 들어오지 않은 동네에서도 무선인터넷을 쓸 수 있다. 무선망은 다른 기간산업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조만간 구호물자를 얻으려는 난민들이 유니세프보다 트위터를 먼저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희소식일까?
일년의 절반을 행성 단위 거리로 여행하는 항공사 국제선 승무원 토비는 홍콩으로 돌아오면 시 외곽에 위치한 부모님의 작은 아파트에 얹혀산다. 홍콩 청년으로서는 조부모와 한집에 살지 않는 것만도 굉장한 일이다. 처음 만났을 때 홍콩에서는 우산혁명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는 가장 두려운 일이 페이스북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미 페이스북 접속이 막힌 중국 본토의 자오는 가상망 우회를 이용한다. 그 역시 불법이지만 중국은 생각만큼 살기 불편한 나라는 아닐 수도 있다. 한국 유학을 마치고 떠나는 그를 고깃집에 데려갔더니 자오는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훑어보고서 “특별한 날에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삶은 너무 불행하다”며 혀를 찼다. 진실은 상대화된 세계에만 허용된 안목이다. 이십대 중반의 미국인 알렉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번 돈을 털어 아시아를 여행 중이었다. 내게 미국에 오면 언제든지 자기 집에 머물라고 했다. 내가 잘 방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아이패드를 꺼내 자그마한 정원이 딸린 2층집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가 쏟아부은 은행 대출금으로 서울에서 보금자리를 구하려면 땅속 깊이 내려가야 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빠르게 확산하는 보편 경험은 인식의 수평적 왜곡을 일으킨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슈퍼카의 엔진 출력, 프리미어 리그 결과, 할리우드 배우의 패션, 시리아의 정세와 영국의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세계의 동질성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을 얻는다. 차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늘 화제에서 벗어나 있다. 느리게 변하거나 사실상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삶의 핵심적인 요소일수록 그렇다. 가치가 고정된 자원들. 너무 중요해서 그런 것들은 민주적으로도 인도적으로도 공유되지 않는다. 다음 세기에도 우리는 주거와 식량과 노동이 차별적인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미래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몇 년 전 캄보디아에서 맞았던 적막한 밤을 떠올린다. 전기 공급이 끊긴 작은 마을은 완전한 암흑 아래 깔렸고, 목을 뽑아 우는 개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미지근한 바람에 실려왔다. 나는 녹슨 펌프로 길어올린 우물물을 컵에 따라놓고 노트북을 펼쳐 밤새도록 인터넷 게임을 했다. 거기서 누구도 나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손아람 작가
손아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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