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언제부터인가 ‘착하다’는 말이 불편해져 버렸다. 한동안 사람을 향한 찬사 중에 하나였던 이 말은 이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볼 때나, 아니면 약한 자를 향한 힘 있는 자의 시혜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게다가 ‘착하다’는 말은 젠더적이다. 여성 대부분이 어릴 적부터 착해야 한다는 강요에 일상적으로 노출되기도 하였다. 사실 가부장제라는 가장 공고한 권력구조에서 상대적 약자인 여성의 가장 손쉬운 삶의 전략은 불평등에 순응하며 ‘착하게’ 사는 것이다. 왜냐면 ‘착한’ 소수자는 포용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권력구조 내 소수자들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다. 강력한 국가·민족 구조 밖의 외국인 노동자, 냉전과 분단구조가 생산해낸 탈북자, 이성애적 가치의 경계에 있는 성적 소수자 등은 수적으로 소수이면서, 동시에 다수의 규범체계 밖에 존재하는 소외된 집단이다.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대상인 소수자는 이로 인해 사회경제적 구조 내 가장 밑바닥에 위치할 확률이 높다. 이들이 그나마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착하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고향 방문을 가서도 시아버지 점심을 걱정하는 결혼이주자, 사장님의 욕지거리에도 군말 없이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불평등한 구조에 순응함으로써 다수에게 인정받고자 한다. 탈북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복지제도에 감사해야 하며, 기꺼이 이등시민의 자리를 받아들일 때만이 남한 주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다. 다수는 자신들이 베푸는 시혜적 시선에 감사하지 않으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소수자가 낯설기만 하다. 다수 중 몇몇은 도와주려 했던 자신들의 선한 의도에 생채기를 입었다며 소수자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이때 호락호락하지 않은 소수자의 모습에 당황한 다수가 선택하는 전략은 이들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여기에 미디어의 관음증까지 합세하면 소수자는 은혜를 모르는 자로,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또 한 번 배제되기에 이른다. 예컨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찬반 논의에서 이주자 문제가 급부상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주자를 보수언론들이 악마화하면서 상당수 백인 노동자 계층 영국인에게 공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인 중 절반이 넘는 이들이 위협이 되어버린 소수자를 쫓아내는 것만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도 브렉시트를 계기로 이주자를 향한 백인 영국인의 인종주의적 증오가 확대되다 못해 일상에서 심심찮게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영국은 미래보다는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소수가 사회적 약자라는 자신들의 위치에 머물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다수는 이를 위협으로 여기고 경계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한국 사회가 좀 더 공정한 세상을 꿈꾸고 있다면 소수는 필연적으로 다수가 점거하고 있는 권력적 우위를 흔들어야만 하고, 다수는 ‘포용’이라는 수세적인 자세를 넘어서는 성찰과 각성을 해야만 한다. 사회적 정의 실현은 다수의 ‘배려’ 수준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만큼 급진적인 사고와 행동의 전환이 필요하며, 이는 소수자가 시작할 수밖에 없다. 소수자는 끊임없이 소음을 만들어내고, 권리를 주장하며, 다수를 불편하게 해야 한다. ‘착한’ 여성, ‘착한’ 탈북자, ‘착한’ 이주민이 아닌, 결코 하나의 성향으로 정의될 수 없는 온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소수자는 ‘착하다’는 위안에 머물러서도, 머물 수도 없다. 착한 소수자는 없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