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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개와 돼지의 과학 / 김우재

등록 2016-07-18 17:55수정 2016-07-18 19:14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유행하는 과학을 하지 말라.” 연구원으로 일했던 실험실에 걸려 있던 이 문장은, 과학자 막스 델브뤼크가 내 지도교수에게 해준 말이다.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는 묻지 못했다. 유행을 따르지 말고 만들라는 것인지, 유행에 현혹되지 말고 좋아하는 과학을 하라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유행하는 과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것인지.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이 조언이, 유명한 생물학 실험실 중 한 곳의 철학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알파고가 유행하자, 정부는 1조원의 돈을 한국형 알파고 연구에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농담일 것이다. 뇌 연구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 오바마 정부의 브레인 이니셔티브를 따라 한국형 뇌지도 사업을 기획 중이라고도 한다. 한국뇌연구원 김경진 원장의 칼럼을 읽는다. 요지는 1천억원으로 미국이 하지 않는 뇌의 한 부분, 예를 들어 두정엽 부위의 초정밀 뇌지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무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비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브레인 이니셔티브는 뇌지도를 그리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이건 그 프로젝트 누리집(홈페이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뇌의 지도를 그리는 일은, 기능과 분자적 기제에 대한 연구가 접목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쓰레기 정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의 프로젝트는 7개의 학제간 연구 과제를 선정해두었다. 이 사업을 총괄하는 코리 바그먼이 예쁜꼬마선충이라는 모델 생물로 연구하는 기초과학자라는 사실은, 브레인 이니셔티브가 인간 뇌만을 대상으로 지도를 그리는 단순한 기획이 아님을 말해준다.

인간 뇌지도를 그리는 일이 의미있다 해도, 우리가 정한 부위를 미국이 그리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을까. 만약 미국이 두정엽 초정밀 지도에 도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나중에는 후퇴를 거듭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부위의 뇌지도를 그리는 건 아닐까. 미국이 부탁하지도 않은 일에 국민 세금으로 미국 좋은 일을 시켜줄 필요는 없다. 이런 식의 한국형 과학이라는 기획 자체가 굴욕적이다.

최근 브릭(생물학연구정보센터)에 실린 호원경 교수의 제안은 그래서 새롭고 의미있다. 한국 과학은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는 하향식에서 현장의 제안을 통해 이루어지는 상향식 연구로 변할 필요가 있다. 군사독재 시기에 정착된 하향식 연구가 여전히 당연스레 집행되는 현실은, 기획과학에 길들여진 후진적 과학정책의 단면이다. 기획과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 기획과학은 독재의 적폐이자, 공산주의 과학이며 종북과학인 셈이다. 종북과학, 박근혜 정부가 기겁할 일이다.

한국이 인간 뇌지도 사업에 뛰어들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서 제안한다. 미국이 선도하는 인간 뇌 대신 개와 돼지의 뇌를 연구하는 국가 차원의 뇌과학 연구 프로젝트다. 해볼 만한 일이다. 창조경제에 부합하는 어마어마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애견 사업은 불황을 모른다. 국내 개 사료 시장만 수천억원대에 달하고, 애완견 국내 시장의 총규모는 6조원에 해당한다. 한국은 세계의 삼겹살 블랙홀로 불릴 만큼, 세계 최고의 돼지고기 소비국이다. 돼지 뇌지도 사업은 효율적인 돼지 사육을 돕고, 심지어 난치병 치료를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서는 안 된다. 자본과 연구의 양과 질 모두에서 상대가 안 되는 한국은 미국 과학의 유행을 따라가선 안 된다. 다리가 찢어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드러난 것처럼 한국 권력층에게 민중은 개와 돼지라는 사실을 언급해야겠다. 민중은 개와 돼지이므로 이 과학은 자연스레 민중의 과학이 된다. 민중의 과학, 과학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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