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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 / 이라영

등록 2016-07-20 18:37수정 2016-07-20 19:16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파리에서 유학할 때 한 친구에게서 상당히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천장에 가득한 곰팡이를 발견하고 집주인에게 이를 알렸더니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집을 살펴보던 주인은 “혹시 한국 음식에 수분이 많지 않으냐. 너희가 먹는 음식 때문에 곰팡이가 생긴다”고 했단다. 그는 프랑스인 남편과 주로 파스타를 해먹었다고 한다.

더 조심하는 사람과 조심할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알제리나 말리 등의 나라를 언급할 때 ‘예전에 우리나라’라고 말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특별히 식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 반대의 입장임에도 ‘예전에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그저 조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 조심하는 이들은 누굴까. 개인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존재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사람들. 아랍인이라 음주 단속에 더 잘 걸리거나 흑인이라 강도로 오해받기도 한다. 세입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한국 음식에서 곰팡이의 원인을 찾듯이. 개인이 될 수 없는 이들은 더 조심하지만 더 진압당한다. 얼마 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강도로 오해받아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흑인의 사례가 그렇다. 바로 내가 사는 곳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라 몸서리쳐지게 체감하고 있다.

흑인의 죽음은 덜 관심 받는다. 의심은 차별적으로 작동한다. ‘흑인의 삶도 소중하다’는 뜻의 구호인 ‘블랙 라이브스 매터’를 말하면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질문이 있다. “흑인에 대한 흑인의 범죄는?”, “경찰의 삶은 중요하지 않아?”, “흑인의 삶만 소중해?”, “경찰에게 희생되는 백인도 있어.” 그러면서 ‘올 라이브스 매터’, 곧 모든 삶은 소중하다고 말해버린다. 어디서 많이 보던 방식 아닌가. 남자도 데이트 폭력 당해, 모든 인권은 중요하다, 이와 똑같은 방식이다.

평소에는 사람의 범위가 협소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차별받던 약자들이 ‘모든 사람’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린다.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흑인은 과거에 단독적으로 초상화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마리기유민 브누아의 <흑인 여성의 초상>은 노예제 폐지 후 흑인 여성에게 개별성을 부여한 정치적인 그림이다. 개별성은 최소한의 인격적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자신의 개별성의 차원을 넘어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통치자는 과장된 초상화와 동상을 좋아한다.

약자와 소수자는 위험 앞에서만 보편적 사람이 된다. 그것이 차별이다. ‘모든 생명의 문제’, 이런 표현은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의롭게’ 제압하는 방식이다. 이런 수사는 순진한 무지와 결합하여 힘을 얻는다. 보편적 문제로 확장되어버리면 더 이상 흑인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바로 이렇게 ‘설명할 수 없게’ 만들어서 그들의 삶을 ‘원래’ 그런 것으로 고착시킨다. 성별을 떠나, 인종을 떠나, 그냥 인간의 문제라고 해버리면 약자와 소수자는 발언권을 가질 기회를 잃어버리며 사람의 범주에서 또다시 탈락당한다.

오늘날 흑백 ‘갈등’이라 표현되는 문제들은 하나의 집단이던 이들이 개별성을 얻는 투쟁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해리엇 터브먼처럼 ‘이름이 있는 흑인 여성’의 초상이 화폐에 들어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오바마나 콘돌리자 라이스처럼 권력을 얻은 소수의 흑인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부 백인들은 ‘지배받는’ 백인이라는 감정을 느껴 ‘역차별’ 당한다고 생각한다. 조심할 필요 없었던 권력이 조심을 분배해야 할 시기가 오자 성을 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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