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회학 연구자 내 꿈은 이야기꾼. 아무리 욕심의 무게를 줄여도 절대 내려놓지 못하는 하나의 욕심은 여전히 이야기꾼에 대한 갈망이다. 이야기, 곧 서사를 만드는 능력과 태도는 삶을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무기’다. 샤리야르의 손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그의 여성 연쇄살인을 멈추게 만든 셰헤라자데의 힘은 바로 천하루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짓는 능력에 있었다. 대통령까지 칭찬했던 영화 <국제시장>에서 가장 딱한 장면이 있다. 영자가 덕수에게 “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고 했을 때 덕수는 “물을 필요 뭐 있습니까. 가난한 집에 맏딸이고 고생해서 번 돈은 죄다 집에 부칠 것이고 동생들이 줄줄이 있겠지요”라며 영자의 상황을 ‘묻지 않아도 다 안다’는 태도를 보인다. 영화 속에서 영자에 대한 이야기는 딱 그만큼이다. 묻지 않아도 아는 인생이란 구체성이 없다. 여성의 서사는 그렇게 직조되지 못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덕수의 꿈’을 언급한다. 영자의 꿈을 마지막에 덕수가 물었을 때 영자는 “멋진 남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고 답한다. 남자와 가정을 제외하고 나면 영자라는 개인은 남지 않는다. 이에 대해 영화는 아무런 인식 없이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라는 깃발을 휘날리며 ‘천만’을 향해 달려갔다. 반면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는 아무리 아름다운 인간의 다리를 얻어도 목소리를 내어주면 아무런 힘도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인어공주의 ‘목소리’는 목에서 나오는 소리만이 아니라, ‘언어’라는 상징이다. 인어공주는 왕자와 사랑하기 위해 마녀에게서 인간의 다리를 얻는 대신 고유의 목소리를 내주었다. 마녀가 인어공주의 혀를 자르는 순간 인어공주는 단지 음성언어만이 아니라 모든 표현 수단을 잃은 셈이다. 표현 수단이 없는 인어공주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말할 수 없다. 마녀는 인어공주에게 다른 조건이 아니라 왜 하필 목소리를 요구했을까. 사람의 마음을 홀려야 하는 마녀에게는 금은보화보다 인어공주의 목소리처럼 매력적인 소통 수단이 더 필요한 재산일 것이다. 안데르센은 ‘형벌로써 침묵당하기’의 고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안데르센의 또 다른 동화 <백조왕자>에도 6년 동안 침묵당하는 공주가 등장한다. 강제된 침묵 속에서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직접 설명하지 못하는 고통은 타자화되어 해석당한다. 이런 사람은 그냥 ‘없는 존재’가 된다. 표현할 수단을 잃어버린 사람은 표현의 자유와도 무관해진다. 이들은 표현 밖의 존재다.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메갈리아’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혔다가 자신이 참여한 게임에서 목소리가 지워진 성우처럼, 여성의 의견 표출은 지독하게 선택당한다. 며느리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어야 한다는 ‘옛말’을 생각해보자. 이는 모든 소통을 차단하라는 뜻이다. 소통의 차단은 이야기를 공유할 수 없게 만들며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여성들은 매번 새로 이야기를 시작하느라 다음 세대로 목소리를 전하지도 못한다. 여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홀로 고립되기를 은근히 강요받으며 산다. 물론 여성의 목소리가 선호되는 자리도 있다. 바로 서비스를 위한 목소리는 여성으로 설정된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낮춘 목소리는 여성의 성역할 중 하나다. 왕자는 필요 없다. (그런데 왕자가 어디 있지?) 더구나 내 목소리를 담보로 왕자를 만날 필요는 없다.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친절’도 필요 없다. 요즘 여성민우회에서 만든 포스트잇이 아주 마음에 든다. 눈치 보지 말고 계속 말하고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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