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은 피해자의 의견이 반영된 공개적이고 투명한 보상방안 마련과 근본적인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며 300여일 넘게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2일 오후,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앞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농성장에서 장하나 전 의원(오른쪽부터)과 삼성 반도체 피해자 한혜경씨, 이종란 노무사 등 반올림 활동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올여름은 낮밤 없이 뜨거워서 숨 돌릴 틈을 안 주더니 정말 별안간 가을이 왔다. 서울 강남역 8번 출구(강남구 역삼동) 앞에 있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 농성장을 찾은 지난 2일도 가을 날씨다웠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도 간간이 불어주었다. 노숙농성하기에 참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자 야속하고 서글펐다. 날씨 이야기는 오늘 농성장 당번인 한혜경씨의 어머니가 먼저 꺼냈다.
“여름이 너무 더워서 다들 고생했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까 벌써부터 겨울날 걱정이 들어요.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어머니의 말끝이 흐려졌다. 한혜경씨는 1995년에 삼성 반도체가 아닌 삼성 엘시디(LCD) 기흥공장에 입사해서 6년 동안 근무했다. 그리고 백혈병이 아닌 뇌종양에 걸렸다. 현재 수술 후유증으로 언어·보행·시력 장애 1급 판정을 받았고 누가 봐도 걱정이 될 만큼 바짝 말랐다. 그런 혜경씨가 밤새 농성장을 지킨다고 생각하니 나는 주책스럽게 눈물이 났다. 난감하던 차에 이종란 노무사가 거들었다. “일 얘기를 해야 (눈물이) 그친다”며 사방에 걸린 폐회로텔레비전(CCTV) 이야기를 꺼냈다. 삼성 사옥에도 건물 외부를 감시하는 시시티브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서초구청이 최근 반올림 농성장 전용 시시티브이를 달았다는 것이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파라솔을 설치했더니 농성장 코앞에 있는 가로등에 시시티브이를 달더란다. 이들도 다 세금 내는 시민이다. 시시티브이 달아서 자신을 감시하라고 꼬박꼬박 세금 낸 게 아니었다.
최근 1년 새 5건 사망자 제보
2014년 5월14일, 삼성전자가 공식 사과했다. 삼성은 2015년 9월 보상절차 시행을 선언하고 2015년 말까지 피해 신청 기한을 못박았다. 그리고 2016년 1월, 언론을 통해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가 9년 만에 해결됐다고 홍보했다. 보상 절차도 끝난 마당에 반올림은 왜 330여일 넘는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삼성의 피해보상 방식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우선 보상 기준과 절차 등을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게다가 보상 기준과 내용은 철저히 비공개로 논의됐다. 이른바 ‘개별보상’ 방식을 통해 피해자들을 의도적으로 파편화시켰다. 특히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를 처음 사회에 알리며 싸움을 이끌어온 반올림의 활동을 위축·고립시키려고 한다.
피해자들을 옥죄는 덫은 산재의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는 현행 산재보험법 체계다. 회사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작업장에서 쓰인 화학물질의 종류와 양을 공개하지 않고 법원과 행정부도 이를 받아들이는 까닭에 피해자들이 걸린 질병과 작업조건의 인과관계를 규명하기 힘들다. 결국 삼성이 보상 절차를 개시했다는 건 공단 또는 법원의 결정을 거치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하겠다는 뜻이다. 소송으로 가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승소 확률도 낮고 비용 부담도 크므로 피해자는 삼성의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다. 제대로 된 보상이 되려면 피해 당사자의 참여 속에 객관적인 외부기관이 보상 방안을 설계했어야 하지만 삼성은 피해자들이 겪는 고충을 유리한 쪽으로 활용했다.
처음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세상 사람들이 안다면 놀라 자빠질 거”라 생각했다. “가만 있지 않을 거고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세상의 반응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땐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엄습했다. 물론 흔쾌히 반도체 노동자들의 편이 되어준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난 332일 동안 쏟아진 무관심의 화살들, 강남역 8번 출구를 오가는 감정 없는 발걸음들을 떠올리며 그냥 가슴이 몹시 아팠다. 나조차도 308일 만에 이곳 농성장을 찾지 않았나.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아팠다.
<또 하나의 약속> <탐욕의 제국> <먼지 없는 방> <사람 냄새: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반도체 소녀>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삼성 반도체 피해자들이 백혈병 등 희귀·난치성 질환에 걸려 다수가 사망한 이야기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만화와 연극 그리고 책으로 소개되어 왔다. 이들은 특별한 사고가 아니라 일상적 업무 중에 화학물질에 노출됐다. 그러나 세상은 이 사건을 너무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사람들이 무심한 것도 문제지만, 정작 이 사건을 제대로 알려야 할 의무는 영화도 만화도 아닌 언론에 있었다. 삼성 백혈병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만화보다 더 만화 같다.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던 고 황유미씨는 2003년 10월 입사해서 1년8개월 만인 2005년 6월에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입사 3년5개월 만인 2007년 3월에 사망한다. 불과 22살의 아름답고도 여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황유미씨가 그랬듯이 삼성 반도체의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 대부분은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진학을 포기하고 고3 때부터 취업을 나간 청년 노동자들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질환과 생리불순, 근골격계 질환을 겪었고 유산·불임도 다반사다. 일부는 백혈병 등 혈액암, 림프종, 뇌종양, 피부암, 유방암, 자궁암 등 희귀·난치성 질환에 걸려 투병하거나 사망했다. 정확한 피해자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해 9월까지 반올림에 제보된 반도체 등 전자산업 종사 피해자는 362명(사망자 130명), 이 중 삼성전자 계열사 종사자는 293명(사망자 106명)이다. 최근 1년 사이에 삼성 반도체·엘시디에서만 5건의 사망자 제보가 있었다고 한다.
330일 넘은 강남역 ‘반올림’ 농성장
“일방적 보상 결정 항의하며 시작
삼성이 피해자들 고통 이용한 것
지금까지 298명 피해 사례 접수
서초구청은 CCTV 달아 감시한다”
10년 차 돼가는 삼성 백혈병 문제
19대 국회 여당 반대로 소위 못꾸려
상시청문회법 ‘삼성 청문회’ 가능
삼성 유리한 판결만 보도하는 언론
올 국감엔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해 9월까지 반올림에 제보된 반도체 등 전자산업 종사 피해자는 362명(사망자 130명)이었다. 이 가운데 삼성전자 계열사 종사자는 293명(사망자 106명)이었다. 2일 오후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서울 강남역 사거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직업병 인정 360여명 중 겨우 14명
반올림이 집계한 370여명의 피해자 가운데 직업병을 인정받은 노동자는 현재까지 14명에 불과하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업재해 판정을 하는 데 보통 3~4년이 소요된다. 난치병과 싸우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다. 3년 이상 조사해서 모두 산재를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공단이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리면 피해자들은 행정소송을 통해 삼성의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고 황유미씨의 경우 공단은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2011년 6월 서울행정법원에서 1심 재판을 이겼다. 공단이 항소하자 2014년 8월 2심에서도 승소했다. 공단은 결국 상고를 포기했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2007년 6월 공단에 산재신청을 한 뒤 백혈병이 직업병이었음을 인정받기까지 7년3개월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은 많은 피해자들이 법적·제도적 구제를 포기하는 이유다.
2012년 2월,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3년간의 조사를 바탕으로 <반도체 제조 사업장 정밀환경평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보고서에는 ‘백혈병 유발 발암 물질인 벤젠,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 등이 극미량 제2 부산물로 발생하고 폐암 유발인자로 알려진 비소도 노출 기준을 초과해 발생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노동부는 조사 이후 더 이상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조처를 하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수백명의 피해 제보가 있는 삼성 반도체 백혈병 사건에 대해 노동부와 공단은 특별한 행정적 조처를 취했어야 한다. 사안의 특수성은 고려하지 않고 삼성 반도체 관련 산재신청 건을 각각 개별적으로 취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삼성의 책임을 덜어줬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1층에는 제품 홍보관이 있고 건물 앞 공터는 누구나 쉴 수 있는 열린 공간인데 반올림 농성장에 온 사람들만 출입금지라고 한다. 농성장 한켠에 세워진 ‘반올림 소녀상’의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일 20대 국회의 첫 정기회가 시작됐고, 오는 26일부터 20일간 국정감사가 실시된다. “매년 국감 때마다 여러 의원이 이 문제를 다뤘지만 달라지는 점은 별로 없었어요.”
이번 국감을 대비하고 있냐는 물음에 이종란 노무사가 한 답변이다. 부인하기 어렵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삼성을 비롯한 재벌 대기업에 유독 관대하고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생각, 기업 살리기가 곧 경제 살리기라는 명분이 삼성에 면죄부를 쥐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예컨대 19대 국회 초기에 환경노동위원회 산하에 쌍용차 정리해고와 노동자들의 잇단 사망 문제를 다루는 소위원회와 삼성 반도체 산재사망 사건을 다루는 소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논의가 활발했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야당 의원들은 소위원회 명칭에서 ‘삼성’이라는 기업명을 빼도 좋으니 반드시 소위를 구성하자고 여당 의원들에게 사정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국정감사 때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의 대표나 임원을 국감 증인으로 부르는 데도 여당은 결코 합의해주지 않았다. 증인·참고인 신청은 반드시 여야 합의를 통하도록 하고 있어 가해 기업의 책임 있는 자들을 불러 심문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차단되곤 했다. 새누리당 의원들도 고용노동부에 삼성 반도체와 관련한 질의를 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긴 했지만 국회 주도로 청문회 등 실효성 있는 조처를 하는 데 협조한 적은 없다. 그렇게 임기 4년이 흘러갔다.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상시청문회법’이라고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됐으나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됐다. 상시청문회가 시행되어 상임위원회 재적위원 3분의 1 요구로 청문회를 실시할 수 있게 된다면, 야당은 여당에 사정하지 않고도 삼성 반도체 청문회를 열 수 있게 된다. 삼성 쪽 증인 없이 삼성 청문회를 실시할 수는 없으므로 증인 합의의 문제도 동시에 해결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만 않았다면 삼성 반도체 청문회는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대통령이 상시청문회법을 거부한 이유가 국정 마비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반(기업) 증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지난해 10월 반올림과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의원이 공개한 ‘수령확인증’. 보상금을 주는 대신 민형사상 권리를 포기하고 보상내용을 비밀로 하며 위반할 경우 보상금을 반환해야 한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다. 삼성은 이 수령확인증 양식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반올림 제공
한국 언론은 언제쯤 반성하려나
최근 반올림과 관련한 판결이 잇달아 내려졌다. 하나는 8월30일 대법원이 3명의 삼성 반도체 노동자에 대해 백혈병과 림프종이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확정 판결한 것이다.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이 2명의 삼성 반도체 노동자에 대해 폐암을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했다. ‘폐암’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최초의 사례였다.
문제는 언론의 반응이었다. 대법원의 산재 불승인에 대해서는 <국민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가 지면 기사를, <문화방송>(MBC) <한국방송>(KBS)이 방송 뉴스를 내보낸 반면, 공단의 폐암 산재 인정 건은 <한겨레>와 <경향신문>만 보도했다(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은 한국의 산재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라는 기사는 쓰지만, 국내 산재 사망 50위 기업 중 39개 기업이 전국경제인연합회 소속의 대기업이라는 사실은 굳이 전하지 않는다. 영화와 만화에 자리를 내준 대한민국 언론은 언제쯤 반성하려나.
삼성전자 서초사옥 1층에는 제품 홍보관이 있고 건물 앞의 공터는 누구나 쉴 수 있는 열린 공간인데 반올림 농성장에 온 사람들만 출입금지라고 한다. 삼성은 농성장 둘레에 빨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반올림 가족이 한 발짝이라도 넘어서면 경비 직원들을 우르르 출동시킨다고 한다. 그 대치 너머로 모든 고통과 분노를 초월한 듯 ‘반도체 소녀상’이 묵묵히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추석 연휴가 길게 느껴진다. 농성장이 더 걱정되는 이유다. 혹시 아직 반올림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이번 연휴 중에 영화와 만화와 책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기 바란다. 아프고 감동적이다. 용기와 사랑이다.
장하나 전 국회의원
▶ 장하나·김광진 눈물 깃든 현장이 도처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성과 합리가 아닌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갈등 공간이 전국에서 부스럼처럼 솟아 가라앉지 않습니다. 해법을 찾지 못한 갈등이 오래 묵어 삶을 곪게 하는 사태는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19대 국회의원 장하나·김광진씨가 갈등의 현장을 찾아갑니다. 청년 비례대표로 정치를 경험한 두 전직 의원이 현장 속에서 정치를 성찰하며 현직 국회의 역할을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