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회학 연구자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에게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청문회에서 사과하기를 거부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과에 머물 뿐 경찰청장으로서의 사과는 끝내 거부했다. 공식적인 사과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그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흔히 동원할 수 있는 수사인 ‘법과 원칙’을 열심히 외칠 뿐이다. 법대로! 그는 청문회에서 “우리 사회에 법적인 구제 절차나 제도적인 의사 표현 절차가 완비돼 있는데도, 그에 응하지 않고 폭력이나 위력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행” 때문에 집회나 시위가 있다고 했다. 또 “갈등은 합법적인 절차로 해결”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까. 2년 전에 <법 앞에서>라는 연극을 본 적 있다. 명함보다 작은 티켓에는 “법 앞에 선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과 카페 ‘그’ 임차상인들의 다큐멘터리 연극”이라고 적혀 있다. 제목에서 짐작하겠지만 이 연극은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바탕으로 한다. 소설 <법 앞에서>는 짧은 글이지만 해석은 어렵고 쉽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워낙 짧은 이야기라 수차례 읽어보았지만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텍스트다. 그런데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연극을 만들지? 나의 의구심은 불필요했다. ‘법의 문지기’ 앞에서 반복적으로 좌절해 본 사람들은 이 소설을 훨씬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삶이 해석을 만들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법으로 두드려 맞으니까 이제 우리 예술가 다 됐어요”라고 했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한 부분 인용하자.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그에게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후에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가능하다오.”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법의 문을 평생 두드렸지만 시골 사람은 끝내 들어가지 못한다. 법 앞의 문지기는 “내가 힘이 장사”라면서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가 있다고 한다. ‘법대로’ 하자면 사람에게 물대포를 직사하는 공권력은 위법 행위를 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불법 집회’를 주도했다고 무려 5년형을 받지 않았나. 책임과 권리는 정의롭지 않게 분배되어 있다. 연극 <법 앞에서>에 출연한 해고노동자와 상가 임차인들은 “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종료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법을 쥐고 있는 이들을 비판한다. 법 앞에 서려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결국 힘센 문지기를 이기고 들어갈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법 앞, 정확히는 법의 문지기 앞에서 좌절하며 문제는 종료된다. 흔히 도덕적인 사람을 두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한다. 법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담긴 말이다. 반면 ‘법대로 하자’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도 있다. ‘법대로 하자’는 사람은 법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법대로’ 하고 싶지만 힘이 없는 사람들은 법에 들어가기 어렵다. 사람 수만큼 법 앞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다. 법에 들어가 법을 합법적 폭력의 도구로 휘두를 수 있는 이들이 ‘법대로’를 좋아한다. 현재 백남기 농민에게 가한 공권력 폭력 행위에 대한 검찰 조사는 중단된 상태다. ‘지금은’ 여전히 안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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