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인정머리 없는 놈의 행성/ 손아람

등록 2016-09-28 18:38수정 2016-09-28 21:07

손아람
작가

1894년, 관료 수탈을 견디다 못한 고부군 농민들이 봉기했다. 화의를 위해 파견된 관군은 이 봉기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비무장 상태의 지역민들을 학살했다. 1919년, 종로에 모인 조선인들이 일제 침략을 규탄하며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일본 언론들은 즉시 이 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강경진압을 요구했다. 8천여명이 학살당했다. 1960년, 마산의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진압 과정에서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사망한 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승만 정부는 강제부검 뒤 사인을 발표하는 대신 배후에 간첩이 있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79년, 부산과 마산의 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에 가담한 민간인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1980년, 광주의 시민들이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민간인 진압에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3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87년, 서울 시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 정부는 폭력 시위를 엄단하겠다고 선언한 뒤 강제진압했다. 3천여명이 연행당했다. 2001년,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김대중 정부는 폭력 시위를 엄단하겠다고 선언한 뒤 강제진압했다. 100여명이 부상당했다. 2006년, 주한미군 부대의 평택 이전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노무현 정부는 폭력 시위를 엄단하겠다고 선언한 뒤 강제진압했다. 100여명이 부상당했다. 2009년, 권리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내쫓기게 된 용산의 철거민들이 재개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강제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6명이 숨졌다. 대통령 훈령에 따라 ‘테러 진압’을 위해 창설된 경찰특공대를 무리하게 투입했다는 비판이 일자, 이명박 정부는 철거민들의 시위가 ‘시가 테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발사한 물대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백남기씨가 지난 9월25일에 사망했다. 새누리당은 “시위가 과격하게 불법적으로 변하면서 파생된 안타까운 일”이라고 논평했다. 인터넷에는 백남기씨가 과격하게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지금도 떠돌고 있다. 불행하게도 새누리당이 처음으로 발명한 사고방식은 아니다. 대통령 사과를 넘어서 행정집행의 최소침해 원칙과 비례의 원칙, 그 위반을 처벌하는 수준의 제도적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법으로 불법을 정당화하는 폭력적 공권력 집행의 관행은 논리적으로 일관된 것이라면 인류의 종말과 함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로 그 예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이야기는 강제철거 예정지의 거주자가 시위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방정부가 고용한 철거용역은 불도저로 거주지와 함께 거주자의 목숨까지 싸그리 밀어버릴 심산이다. 때마침 지구의 하늘 위로 거대한 우주선이 나타난다. 외계인들은 인류가 철거 예정 행성을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하며 지구를 떠날 시간 2분을 준다. 각국 정부의 애걸복걸하는 호소에 돌아온 외계인들의 대답은 이렇다. “이 인정머리 없는 놈의 행성, 너희한테는 동정심조차 안 생긴다.” 물대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고에너지 레이저빔이 발사되고, 그저 제자리에 있었을 뿐인 지구는 영원히 소멸한다. 이따위 세계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결말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계엄이 제대로 깨운, 국힘의 ‘민정당’ 유전자 [성한용 칼럼] 1.

계엄이 제대로 깨운, 국힘의 ‘민정당’ 유전자 [성한용 칼럼]

[사설] 윤석열 체포 방해는 ‘제2의 내란’이다 2.

[사설] 윤석열 체포 방해는 ‘제2의 내란’이다

대국민 ‘관저 농성’과 경찰의 결기 [전국 프리즘] 3.

대국민 ‘관저 농성’과 경찰의 결기 [전국 프리즘]

윤석열 아래 ‘악의 빙산’을 보라 [신진욱의 시선] 4.

윤석열 아래 ‘악의 빙산’을 보라 [신진욱의 시선]

[사설] ‘8인 체제’ 이룬 헌재, ‘윤석열 탄핵’ 압도적 민심 새겨야 5.

[사설] ‘8인 체제’ 이룬 헌재, ‘윤석열 탄핵’ 압도적 민심 새겨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