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얼마 전 북한이 또 한 번의 핵실험을 자행한 이후 ‘북한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과 해법이 봇물 터진 듯 쏟아졌다. 대북 제재의 고삐를 더더욱 틀어쥐어야 한다는 주장부터, 이제는 대화를 시작할 때라는 목소리도 커져간다. 정부의 입장을 되뇌는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동요하고 있다는 추측성 분석에 덧붙여 급변사태, 선제타격, 전술핵 배치 등 무책임한 주장을 늘어놓고, 상대적으로 대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북에 대한 동정심에 최근 북한 사회의 변화 징후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모두들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진단한다고 하지만 사실 진영논리에 충실할 뿐이다. 게다가 북한 ‘전문가’의 직함으로 미디어를 누비는 이 대부분이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북핵이라는 위기와 이에 대응하는 한국 정부의 제재 국면에서 한반도의 미래와 현 상황의 근원적인 원인을 고민하는 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즉 ‘북한 문제’에 대해 전문가는 넘쳐나지만, 이 문제를 경유하여 진정한 ‘앎’을 추구하며, 분단 극복을 위한 윤리적 성찰에 매진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특수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원리와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지식인의 존재 이유라는 사르트르의 주장과 정치적 선동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양해야만 한다는 베버의 통찰은 작금의 상황에서 그 어떤 감흥도 되지 못한 듯싶다. 하긴 지식인이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겠는가. 대중지성의 시대, 불의와 맞서 싸우는 김제동의 말 한마디가 기능인이 되어 버린 백 명의 대학교수가 쓴 글보다 더 큰 울림을 주지 않던가. 문제는 한반도의 긴박한 현 상황이 ‘진정한’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남과 북, 혹은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이라도 삐끗한다면 이곳에서 재난적 결과가 초래될 것이 자명하고, 이 엄중한 상황의 ‘본질’을 고민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지식’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이들의 사회적 책무이다. 정치적 논리에 따른 교활한 대응이나 몇몇 정치가의 감정적 결정, 혹은 방향을 잃은 대중 동요의 파편만으로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릴 수 있다. 기계적인 지식 전문가 혹은 정치적 선동가가 아닌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향한 윤리적 통찰이 절실한 이유이다. 그만큼 지금 이곳에서 지식인이고자 한다면 단순한 현상 분석 수준이 아닌 궁극적인 평화를 고민하며 세계의 모순과 비참에 결연히 대항하는 담론을 생산해내야만 한다. ‘진정한’ 지식인이 되기란 쉽지 않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사회 내 존재로, 특정 계급의 일원이기에 결코 객관적일 수 없지만 객관성을 추구해야만 하는 존재적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덧붙여 지식인은 이들의 존재 이유인 ‘지식’이 사실 지배계급의 은폐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 이를 폭로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 존재이다. 즉, 이들은 자신의 존재 근간을 스스로 무너뜨릴 때만이 ‘진정한’ 지식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만큼 ‘지식인’이 되는 것은 외롭고 괴로우며 자기분열적인 과정이다. 얼마 전 중국 용정의 명동촌에서 만난 윤동주의 고뇌를 기억한다. <쉽게 씌어진 시>의 한 구절.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이 어둠이 짙게 드리운 한국에서 ‘진정한’ 지식인이 되기란 이다지도 어려운데, 난 오늘도 ‘쉽게’ 글을 쓰고, ‘쉽게’ 강단에 선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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