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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대한민국, 사유화된다

등록 2016-11-01 18:25수정 2016-11-01 19:49

대한민국은 재벌 왕국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제적 역할, 경제에 대한 개입 범위 등은 여전히 무시 못할 수준이다. ‘커넥션’과 돈은, 기업에 의한 그 힘의 사유화를 뜻한다. 물론 피해를 보는 쪽은 바로 대다수의 피통치자들이다. ‘기업 봐주기’ 대가로 최고 권력자의 측근들이 기업들로부터 ‘사설 세금’(?)을 거두는 것은, 이런 구조에서는 그저 자연스럽게 보이기만 한다.

자본이라는 것도 서로 경쟁하는 수백개의 재벌·중견 기업들이다. 많은 경우에는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상호 충돌해 권력자들을 상대로 경쟁적으로 로비를 벌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야말로 세상의 ‘최순실들’이 갖고 있는 재화, 즉 권력에의 사적 접근은, 정말 황금의 값어치가 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요즘 ‘최순실 게이트’를 지켜보면서 자꾸 기시감이 든다. 이미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다. 정권 비선의 딸이 부정 입학을 했다? 이미 1957년에 이승만의 양자이자 그 최측근인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의 서울대 법대 부정 편입학 사건이 온 나라의 화젯거리가 된 일은 있었다. 그때도 정권 실세의 아들이 정치인·관료 위에서 군림했으며, 그때도 정권 쪽의 부정 편입학 요구에 교수와 총장이 손을 들어 타협하는 한편 학생들이 맹휴 등 투쟁을 벌인 것이었다. 대통령이나 그 최측근, 친인척의 발호는 대한민국 정치체제의 고정된 패턴으로 보이기만 한다. 나는 지금도 1997년에 당시의 김영삼 대통령이 아들 김현철의 비리에 대해서 공개사과를 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었던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가 “제 아들 관리도 못하는 저놈은, 이게 무슨 어른이냐?”라고 침을 뱉어내듯이 욕한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한데, 김영삼의 평생 라이벌이자 후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3명이나 다 비리에 연루돼 유죄판결을 받은 점까지 생각해보면, 이는 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 문제라고 봐야 한다.

‘공복 정신’이니 ‘노블레스 오블리주’(신분이 귀한 만큼 의무를 져야 한다)니 등등을 들먹이면서 환상을 갖지 말자.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사회, 그것도 가장 극단적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다. 이 사회에서는-법이 아닌 ‘통념’의 차원에서는- 성이 폭넓게 매매되고 불전 내지 성금을 많이 내면 극락왕생 내지 천당행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부자가 자신의 부하나 서비스업 노동자에게 모욕을 가하거나 폭행을 해도, 적당한 합의금만 내주면 사실상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사회다. 즉, 인간의 존엄성도 공공연하게 매매된다. 성도, 종교 신앙도, 인간의 자존감도 다 돈을 매개로 해서 실천되거나 매매될 수 있다면, 권력, 또는 권력자에의 개인적 접근이 각종 비리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순진히 믿을 수 있을까? 박근혜씨의 경우에는 개인적 무능, 특히 공과 사 구별 능력의 태부족이 한국 현대사상 기록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박근혜씨보다 조금 더 정상적인 후보가 대통령이 돼도 그 친인척과 측근들이 발호를 도모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권력, 또는 권력에의 사적 접근이 가장 값진 재화인 사회에서는, 최고 권력자의 측근들이 그 재화를 돈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으면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문제의 진정한 핵심이다. 왜 김영삼 정권의 ‘소통령’ 김현철이 한보 등 재벌로부터 돈을 이렇게 쉽게 상납받을 수 있었는가? 왜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특수 신분’인 그 아들 김홍걸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및 아파트 건설 승인 청탁 대가로 36억원이나 사업자로부터 뜯어낼 수 있었는가? 왜 고 경남기업 회장 성완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에게도, 현 정권의 실세 중의 한 명인 김기춘에게도 이런저런 청탁을 한 것으로 수차례에 걸쳐 보도됐는가? 왜 솔로몬저축은행과 코오롱은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에게 수억원이나 상납해야 했는가? 그리고 결국에 왜 최순실에게 재벌들이 800억원이나 주었는가?

여태까지 친척 비리가 없었던 대통령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대통령의 자녀나 형제 내지 측근을 통해서 재벌들이 돈을 건네 ‘문제 해결’을 의뢰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공인된 메커니즘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권력에의 사적 접근이란 이렇게도 비싸게 거래되는 하나의 재화로 부상했는가? 개발독재 시절 같은 경우에는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개발은 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개발 자금은 관치금융 시스템을 통해 재벌들에 국가적으로 조달됐기에, 국가와의 관계는 당연히 기업인에게는 사활의 문제 그 자체였다. 이런 개발 시스템에서 부정부패가 구조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밝힌 바 있다. 한데,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산다. 관치금융 등은, 금융시장이 이미 상당 부분 외국 자본에 장악돼 있는 상태에서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더군다나 정권교체도 어느 정도 정례화돼 있기에 정권 실세에의 상납이 결국 밝혀져 비록 솜방망이긴 하지만 적어도 형식적 처벌은 받을 위험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왜 최순실에게 재벌로부터 엄청난 금액이 이렇게도 쉽게 흘러들어갈 수 있었는가?

여기에서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몇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은 재벌 왕국이긴 하지만, 국가의 경제적 역할, 그리고 경제에 대한 개입 범위 등은 여전히 무시 못할 수준이다. 토건을 비롯해 각종 공공프로젝트 사업자 선정도 기업들이 겨냥하게 돼 있는데, 각종 인허가와 관련해 국가의 힘 역시 막강하다. ‘커넥션’과 돈은, 기업에 의한 이 힘의 사유화를 뜻한다. 물론 피해를 보는 쪽은 바로 대다수의 피통치자들이다.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 노후 선박 선령 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해준 이명박 정권의 조처를 기억하는가? 평민들이 목숨을 걸고 배를 타는 세상이 됐지만, 관련 기업들로서는 환하게 웃을 일이 아닌가? 이런 ‘기업 봐주기’ 대가로 최고 권력자의 측근들이 기업들로부터 ‘사설 세금’(?)을 거두는 것은, 이런 구조에서는 그저 자연스럽게 보이기만 한다.

둘째, 경제 개입 가능성이 높은 국가 권력을 기업이 사유화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장치들은 매우 불충분하다. 원칙상 검찰청 등은 그런 장치가 돼야 하지만, 지난 20여년의 역사를 보면 사법부에 대한 기업들의 영향력 확보도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검사들이 재벌의 돈을 받는 등 공공권력을 돈과 맞바꾸는 일은 비일비재해도,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전 법조비리 사건(1999년) 때 검사 25명의 뇌물 수수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사법처리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삼성 X파일’ 사건(2005년) 때 ‘떡값 검사’ 명단을 발표한 노회찬 의원은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지만 ‘떡값 검사’들은 지금도 건재하다. 윤상림 게이트(2005년) 때도 ‘대가성이 없다’고 하여 사건에 연루된 판검사들이 아예 어떤 징계도 받지 않았으며, 스폰서 검사 사건(2010년) 당시에는 비록 일부 검사가 징계를 받기는 했지만, 사법처리는 면했다. 국가의 사유화를 막아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각종 기업인들의 장학생으로 전락한다면 과연 이런 국가의 공공성은 어느 정도일까? 원내 주류 야당도 대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게 돼 있다는 점도, 언론들도 대기업 광고로 먹고산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기업인들이 돈을 주고 권력에의 사적 접근이라는 재화를 사고자 한다면, 이를 막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정말로 지난한 일이다.

셋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자본의 주문대로 정책을 찍어내 집행하는 기업들의 행정도구라고 규정할 수 있지만, ‘국가’도 ‘자본’도 그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현실 속의 국가 운영 주체란 서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는 주류 여야 정객의 패거리들이다. 부단히 싸워야 하는 만큼 이들 각자에게도 ‘스폰서’가 필요하다. 동시에 자본이라는 것도 서로 경쟁하는 수백개의 재벌·중견 기업들이다. 이들의 정책 주문 중에서는 공통된 것도 적지 않다. 각종 자유무역협정부터 민영화 정책, 노동운동 탄압까지, 저들의 대부분은 적극 추진한다. 한데 많은 경우에는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상호 충돌해 권력자들을 상대로 경쟁적으로 로비를 벌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야말로 세상의 ‘최순실들’이 갖고 있는 재화, 즉 권력에의 사적 접근은, 정말 황금의 값어치가 된다.

박근혜씨의 대통령 자격 부족은 독보적이지만, 이미 행정부와 사법부가 기업의 주문을 받아주는 꼭두각시가 된 상황에서 그 어느 대통령 밑에서도 ‘최순실’이 둥지를 틀어 행정자원과 금전의 교환을 주관할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항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업국가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 비리 공화국은 영구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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