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제주팀 기자 광주시 북구 망월동엔 또 한 명의 억울한 주검이 들어왔다. 안장 이틀 뒤 찾아간 ‘농민 백남기’의 무덤은 아직 시들지 않은 수백 송이의 국화에 덮여 있었다. 주위의 높다란 소나무 숲에선 차가운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산 자들이 남기고 떠난 격문들이 바람 속에서 깃발처럼 펄럭였다. 무덤 위의 풀들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를 실어나르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이미 너무나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될까/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이들의 외침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될까.” 이 노래는 미국의 밥 딜런이 올해 노벨문학상을 타면서 익숙해졌다. 1963년에 발표된 이 노래의 가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 꼴이 엉망인 요즘 한국을 떠올리게 만들어 얄궂기까지 하다. 망월동엔 80년 5·18 민중항쟁 직후 묘지가 생겼다. 애초에는 눈에 안 띄는 변두리 야산에 설치된 시립공원묘원의 일부였다. 5·18 희생자들은 당시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 와 이곳에 집단으로 매장됐다. 계엄군한테 죽임을 당해 이곳에 묻힌 시민·학생은 139명을 헤아렸다. 피맺힌 사연을 전해 들은 순례객이 국내외에서 몰려들며 이곳은 저항과 인권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이후 국가 폭력에 목숨을 빼앗긴 이들이 차례로 안장됐다. 5·18 이후 처음으로 묻힌 사람은 87년 시민항쟁의 도화선이었던 연세대생 이한열이었다.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경찰의 최루탄에 스러진 이씨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91년 공안정국 때는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절명한 명지대생 강경대가 들어왔다. 장례 행렬을 막아선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한 시민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맨 나중에 묻힌 이는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보성 농민 백남기다. 시민들은 하마터면 ‘병사’로 몰릴 뻔한 그를 광주 금남로에 맞아들여 민주의 제단에 고이 묻었다. 정권은 위기마다 기관총으로, 최루탄으로, 쇠파이프로, 물대포로 선량한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때마다 시민이 수습한 숫자는 여태껏 52명에 이른다. 불의한 권력자는 죽은 이들이 모이는 것조차 두려웠다.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 공간을 없애기 위해 공작을 서슴지 않았다. 돈으로 매수하거나 색깔을 들씌우기도 했다. 하수인은 집요한 공작으로 일부를 이장하고 일부를 파묘하는 등 인륜조차 포기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 97년 국립묘지를 만들도록 했다. 5·18 희생자가 이장되자 이곳은 민족민주열사의 묘지가 됐다. 망월동 묘지는 솟을대문도, 높은 탑도 없는 민중들의 무덤이다. 학생·교사·시인·농민·노동자들이 누워 있다. 열사들이 잠든 마석 모란공원, 양산 솥발산공원, 천안 풍산공원, 칠곡 현대공원 등지처럼 추모의 공간이다. 유영봉안소에선 고비마다 역사의 물꼬를 튼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봉안소 한가운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가 큼직하게 자리잡았다. 이들이 꿈꾼 세상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는 민심과 다르지 않았다. 이들을 두고 망월동을 나오면서 “얼마나 많은 촛불이 켜져야, 억울한 죽음이 사라질 수 있을까”라고 반문해봤다. 무덤 위의 풀들도 다시 노래했다.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이었다. “모든 사람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 봐요. 더는 살인도 죽음도 없는 곳을요.”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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