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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지역이 중앙에게] 박정희와 구미터미널 그리고 민회 / 김수민

등록 2017-01-18 18:30수정 2017-01-18 21:20

김수민
전 구미시의원·녹색당

내가 이러려고 이 지면을 맡았나 자괴감까지 들지만, 이번에도 구미시의 박정희 기념사업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겠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재정을 허비하느라 화장지도 못 거나?” 구미버스터미널에 붙은 ‘화장지 없음’ 안내문 사진이 퍼지며 구미시는 연초부터 망신을 당했다. 5억원 이상 흑자를 올리는 것으로 알려진 터미널운영업체와 얼마간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구미시 사이의 ‘분쟁’으로 밝혀졌지만, 지역 내 반대 여론과 시국 상황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기념사업을 밀어붙여온 구미시로서는 ‘자업자득’이었다.

시민들이 싸잡혀 욕먹을 일은 아니다. 단체장과 기득권 세력과 의회부터 보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사업 구미시민추진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절제를 요청하는 위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새누리당 12석, 더불어민주당 2석, 무소속 9석의 구미시의회도 역시나 거수기 역할을 수행했다. 민주당의 한 구미시의원은 ‘구미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것 자체는 좋다’며 이 담합의 완성도를 높였다.

하지만 지난해 6월 구미와이엠시에이(YMCA)가 실시한 시민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6.8%가 구미시의 박정희 기념사업에 대해 ‘과하다’고 평가했고, ‘박정희’를 ‘구미시 브랜드화’하는 사업에 대한 반대율은 찬성률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분명히 강조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전의 여론조사 결과가 이 정도였다. 그러나 8 대 2 또는 5 대 5의 여론은 단체장의 독선과 여야 의원 23명의 담합으로 묻혀버렸고, 끝내 도시 이미지까지 실추되고 말았다.

어떤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선거제도? 개혁하더라도, 다수파 여당 의원들이 반대파나 내부의 이견을 무시하고 소수파 야당 의원도 자기 지지자들을 팽개치는 현실은 반복될 수 있다. 시민들의 정당 참여?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잘 알고 뽑자”?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데다 공직자의 일탈이나 변질을 누가 예견하랴. 직접민주주의의 활성화? 일단 주민투표의 경우 자주 하기 어렵다. 여러 해답이 필요한데, 나는 그중 하나로 단체장과 지방의회의 폭주를 방지할 수 있는 ‘추첨제 민회’를 들고자 한다.

아직 나는 민회로 의회를 대체하자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영영 반대할지도 모른다. 직업정치인이 갖는 상시성과 지속성, 책임성을 ‘민회’의 아마추어리즘이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다만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민회에 몇 가지 권한이라도 줘보는 것은 어떨까. 민회에서 어느 정도 동의를 얻으면 의회로 안을 발의할 수 있다거나, 의회를 통과한 안이라도 민회에서 3분의 2 이상이 반대하면 제동이 걸린다거나. 또 현행 제도에서 발의하기가 까다로운 주민소환이나 주민투표를, 민회에서 어느 정도의 정족수를 넘김으로써 발의할 수 있다거나. 그래도 많은 일들이 의회 다수파나 단체장과 관료의 뜻대로 되겠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지목받은 쟁점이 일방통행으로 처리될 공산은 낮아질 것이다.

이 민회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의회가 따로 있는 마당에 굳이 선거로 선출할 필요는 없다. 단체장이나 의회가 위촉하다가는 박정희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 꼴이 날 것이다. 가장 공정한 절차는 성별, 구역별 등으로 인원을 할당해서 추첨하는 것이다. 단, 지원자들을 두고 거기서 추첨해선 안 된다. 당첨자에게 거절을 당할지언정 전체 유권자를 놓고 선발자와 대기자를 추첨해야 대표성이 확보된다. 그리고 구성원에게 주는 활동수당은 필수다. ‘기본소득’을 도입해도 좋을 것이다. 인원수는 적지 않아야 또 다른 특권층화를 막을 수 있다.

이렇게 나는, 누리꾼들이 구미버스터미널 화장실 풍경 사진을 보며 구미시가 빠진 심각한 문제를 상상하는 동안, 단체장이 밀어대고 의회가 담합해서 통과시킨 박정희 광신사업이 민회 구성원들의 반대에 막혀 제동이 걸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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