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회학 연구자 자유를 독점하려는 이들을 하루 이틀 본 것은 아니지만 요즘 더 강력하게 제도의 옷을 입은 ‘막장’에 호흡을 고르는 중이다. 미국 주간지 <뉴요커>의 13일자 표지는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성화에 불이 꺼진 채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세상은 어둠에 잠겼다. ‘자유’의 소멸을 상징한다. 트럼프의 취임식 당일에는 많은 박물관과 갤러리들이 문을 닫고 ‘예술 파업’을 통해 트럼프의 갖가지 반민주적 정책에 항의하는 표현을 했다. 위대한 미국을 만들겠다는 트럼프에 대항한 ‘위대한 거부’의 실천이겠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꾸준히 그를 비판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적 형식을 거쳐서 당선된 대통령을 거부하는 행위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냉소는 정치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정치혐오는 지배자가 간절히 바라는 태도다.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이 들고 나온 팻말 중 “우리는 옳은 것과 쉬운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가 눈에 들어왔다. 이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에 나오는 문장이다. 편함이 옳음을 압도하는 시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문화계뿐 아니라 온 사회를 요동치게 만든 한국 문화계 블랙리스트. 당장 우리를 배고프게 만들지는 않지만 그 실상은 무시무시한 행동의 첫걸음이다. 사회 구성원을 ‘부정’이라곤 아예 생각할 수 없는 평면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런데 평면적 사유는 블랙리스트에 저항하는 움직임에서도 여전하다. 국회에 전시된 ‘더러운 잠’이 그렇다. 대통령이 아니라 ‘여성’을 조롱한 작품이라 비판하자 ‘블랙리스트로 억압받는 예술가들이 이 정도 저항도 못 하냐’는 항변이 들린다. 안타깝지만 ‘더러운 잠’에는 ‘저항’이 없다. 풍자는 지배 권력에 대한 도전이어야 한다. 그것이 유머의 정치화이며 풍자가 가진 긍정적인 공격성이다. 지배 권력과 무관한 개인의 약자성을 부각할 때 이는 어떠한 도전이나 저항과는 무관하다. ‘자유’라는 개념을 게으르게 사유하면 오히려 지배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져주는 역할을 한다. 마르쿠제가 <1차원적 인간>에서 정의한 ‘위대한 거부’를 생각해보자. 현실을 지배하는 형식과 권력을 향한 ‘위대한 거부’는 바로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 예술이 가진 ‘부정’의 힘을 통해 인간은 ‘자유’에 다가갈 수 있다. 자유란 ‘내가 편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이 편한 상태를 의심해야 한다. ‘편함’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1차원적 사유에서 벗어날 도리가 있을까. 1차원적 사유란 ‘현실을 넘어서는 생각을 회피하는 것’이다. 예술의 저항은 치열한 사유와 용기 속에서 생산할 수 있다. 풍자 대상의 성별을 적극 활용한 작품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배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지배 행위이다. 이는 자유를 독점하는 태도다. 지금까지 ‘박근혜’라는 한 여성/인간이 대통령이 된 이후 그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작의 언어를 보자. 힙합도, 미술도, 이 사회에 전혀 충격을 주지 않는 진부하고 반복적인 성차별적 조롱을 저항의 이름으로 생산했다. ‘미스’나 ‘년’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거나 맥락이 없는 출산이나 누드라는 소재를 활용한 작업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권력을 가진 ‘저잣거리 아녀자’를 향한 옹졸한 조롱일 뿐 권력을 향한 풍자는 아니었다. 오랜 정치적 억압으로 풍자의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의 그늘 속에서 한 치도 성장하지 않는 미숙한 작품들에게 굳이 저항의 이름을 붙여줄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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