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회학 연구자 영화 <멜키아데스 에스트라다의 세 번의 장례식>. 미국 국경수비대에게 한 멕시코인이 어처구니없이 죽는다. 첫 번째 매장은 방치, 두 번째 매장은 은폐였다. 이 영화는 그의 친구가 그를 죽인 사람을 끌고 매장하러 가는 여정이다. 에스트라다를 죽인 미국인은 갖은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멕시코까지 가서 제 손으로 직접 시신을 묻고 비로소 참회한다. 멕시코인은 세 번째 매장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형식을 갖추고 묻힐 수 있었다. 죽음도 돌봄이 필요하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쓴 일기다. 어떤 날은 하루에 네 번이나 썼다. 제과점에서 점원이 ‘여기 있어요’라는 뜻의 ‘부알라’(voil?) 한마디만 뱉어도 그는 눈물을 쏟는다. 엄마와 평생 나누었던 그 말,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졌다. 바르트는 끊임없이 부재의 고통을 말한다. ‘여기’에 없는 그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장례식을 치르지만 장례의 기간으로 애도가 충족되진 않는다. 긴 애도 기간과 복잡한 절차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인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형식이 단지 껍데기가 아닌 이유다. 조선시대에 3년상도 아무나 치르지 못했다. 슬퍼할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 도덕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예술 작품은 물론이고 각종 전통적인 기념일들은 애도의 연장인 경우가 많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은 애도할 권리를 박탈하고 애도의 대상을 정해준다. 박정희 동상이나 기념관 등은 바로 애도의 애국화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가 이 사회에 남긴 상흔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그는 세월호 사건 유가족들의 슬픔을 외면했다. 사람을 잃은 슬픔을 억압하는 것은 죽음을 ‘사건’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죽음이 사건이 될 때 사람은 행동한다. 밥만큼이나 투쟁해야 할 가치는 슬퍼할 권리를 얻는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시간은 슬픔을 지우지 않는다. 다만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조금씩 적응해갈 뿐이다. 슬픔(애. 哀)과 사랑(애. 愛)은 같은 소리를 낸다. 사랑이 노동이듯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도 노동이다. 사람이 태어나 3년, 죽은 후 3년은 떠나온 세계와 도착한 세계 사이에서 안정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이 기본적인 권리를 쟁취하지 못하면 인간적인 삶이 어려워진다. 삶은 만남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실로 채워진다. 만나던 사람을, 살던 장소를, 일하던 직장을, 가지고 있던 돈과 물건을, 비물질적인 명예도, 심지어 아무도 훔칠 수 없을 듯한 한 개인의 기억조차 병으로 잃을 수 있다. 노란 리본과 태극기가 충돌하는 모습을 통해 적어도 이 땅의 애국이 애도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란 리본은 ‘철거’되고, ‘미행’당해왔다. 애도의 상징이 반정부의 상징이 된다면, 도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박근혜는 평생 애국과 제 부모에 대한 애도를 동일시했다. “불타는 애국심”을 부르짖던 박근혜에게 애도 대상은 오직 제 부모뿐이었다. ‘민주주의’는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쓴 단어 순위 400위 안에도 속하지 못했다고 한다.(<한겨레21> 1096호) 국가는 필요에 따라 조직적으로 개인의 애도를 방해한다. 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망자는 이 세계에서 없어지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 ‘실종자’는 ‘미수습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이름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원통함이 연결되어 있다. 세월호가 올라왔다. 사건의 원인을 밝힘은 물론이요, 사건 이후 애도 방해를 주도한 인물들이 사람으로서 그 죗값을 치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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