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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군함외교, 142년 만에 돌아오다

등록 2017-04-18 18:35수정 2017-04-19 18:27

만에 하나 평양에 델리나 베이징처럼 미 대사관과 미 기업들의 지점들이 생기고 투자가 이루어지고 평양 지도층의 자녀들이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되면,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은 과연 여전히 ‘북폭’의 대상으로 거론될까? 물론 아닐 것이다.

‘북한 위협’의 유령을 이용하면서 한국을 영구적으로 그 손아귀에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 당국자들의 망상일 뿐이다. 결국 사드 같은, 한국인에게 해만 되는 미국의 불장난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미국과 거리를 두고 지역안보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요즘 러시아에 있는 가족한테서 자주 연락을 받는다. 한반도가 군사적 위기에 휩싸여 있는데, 당신과 인연이 있는 한국인들이 걱정된다는 내용이다. 걱정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뉴스’가 있다. 미국의 칼빈슨 핵 항공모함 전단이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원동지역이 한반도와 접경을 이루고 있기도 한 러시아의 공론장이나 미디어 공간을 가차없이 강타했다. 러시아 국회 상원의 국방안보위원회 위원장은, 미국의 북폭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언급을 하고, 러시아 공군이 전투대비태세를 갖추었다는 뉴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한반도’는 절로 인구에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다. 국내에서는 덜 체감될지 모르지만, 한반도 바깥에서는 시리아와 함께 한반도는 세계적 안보 긴장의 또 하나의 핵심을 이루는 장소로 비치고 있다.

미국은 핵 항공모함을 한반도에 재배치하는 이유로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내세운다. 특히 자주 거론하는 것은, 북한이 몇년 만에 미국 본토까지 타격이 가능하고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단계에 다다랐을 가능성이다. 미국 주류 매체의 선전대로 북한을 바로 악마의 왕국쯤으로 보는 사람들이야 이런 가능성을 위협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사고하기만 하면 그런 가능성 자체는 꼭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중국이 현재 둥펑-41호라는,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해서, 중국 연안에 바로 핵 항공모함을 보내 ‘선제공격’ 등을 들먹이는 게 아니지 않은가? 중국이 그런 미사일을 보유한다고 해서 지구를 파괴시킬 대미 핵전쟁을 먼저 시작할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미국 극우들도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인도가 지금 개발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인 아그니-6호의 사정거리는 1만2천 킬로미터 정도 될 계획인데, 인도를 서방세계에서 그 누구도 “위협”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이나 인도가 외교, 무역, 투자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다고 해도 미국 극우들도 이를 ‘선제공격’해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북한을 - 비록 북한이 인도나 중국과 같은 대국은 아니더라도 -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은 도대체 왜 불가능할까? 만에 하나 평양에 델리나 베이징처럼 미 대사관과 미 기업들의 지점들이 생기고 투자가 이루어지고 평양 지도층의 자녀들이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되면,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은 과연 여전히 ‘북폭’의 대상으로 거론될까? 물론 아닐 것이다.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당장이라도 대응해야 할 ‘위협’으로는 분명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매우 상식적인 질문을 해보자. 미국이 왜 하필이면 대북 수교와 전반적 관계 정상화를 이렇게도 기피하는가? 인도·파키스탄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하면서 왜 북한에만 하필이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선 핵 포기’를 강요하여 교섭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대북 관계 정상화 대신에 상당한 비용부터 드는 전쟁 연습이나 항공모함 파견을 굳이 하는 속셈은 무엇인가?

속셈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가장 뻔한 것은, 사실상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다. 즉 일본과 남한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권역에서 미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일 및 주한 미군 기지의 존속, 그리고 더 포괄적으로는 지속적 군비 증가를 위한 하나의 구실로 ‘북한 위협’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억눌러 동북아에서의 패권을 고수하기 위해 군대를 계속 주둔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북한 위협”을 들먹이는 것이 훨씬 더 외교적인 방법일 것이다. 우선 미국 유권자 설득에도 훨씬 더 유효하다. 솔직히 “일본과 남한이라는 미국 군사보호령들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까놓고 이야기하면 “왜 굳이 미국 납세자의 돈으로 미국 본토와 인연도 없는 동북아에서 패권주의 놀음을 벌여야 하느냐”고 하는 고립주의적인 반발은 반드시 온다. 한데 미국인의 의식 속에서 이미 극도로 악마화돼 있고, 공공연하게 ‘미국의 적 1호’로 인정되는 북한의 ‘미 본토 타격 가능 미사일 위협’을 거론하면 그 어떤 고립주의자도 반발하기 힘들 것이다. 미국의 주류 방송과 신문을 통해서만 세상 소식을 접하는 다수의 미국인들이, ‘정신 나간 폭군 김정은’이 곧 미국 본토를 타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정도로 언론들의 악마화 전략은 잘 먹혀들어간다.

그런데 ‘북한 위협’이라는 카드는 단순히 미군 기지 존속과 펜타곤 예산 증액만 겨냥하는 것도 아닐 듯하다. 중국도 미국의 견제 대상이지만, 미국 극우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 중국 편으로 넘어갈지 모를” 한국 국민들도 사실 견제의 대상에 포함된다. 항공모함 한반도 파견의 타이밍은 대단히 절묘하다. ‘태양절’(김일성의 탄생일, 4월15일)에 있을지도 모를 어떤 무기 시험에 맞추어져 있다고 하지만, 바로 한국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보려는 시늉을 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요구에 넘어가 친미 일변도라는 본색을 드러낸 박근혜가 시민에 의해서 쫓겨난 직후이기도 하다. 물론 백악관은 핵 항공모함 파견과 한국 내부 사정 사이의 그 어떤 관계도 언급한 바 없다. 그런데 미국의 여러 극우 매체들은 박근혜 탄핵 인용을 전후해서 “친중국 좌파가 이 틈을 타서 한국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기도 했다. 물론 그 당시 가장 유망해 보였던 대선주자인 문재인은 결코 ‘좌파’가 아니었다. 한데 그는 한때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중국 견제’에 혈안이 되어 있는 미국 극우들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안겨준 것 같다.

하지만 항공모함 파견을 포함한 미국 쪽의 위협적 분위기 조성은 곧바로 상황을 바꾸어놓았다. 다른 후보 안철수는 이미 2월부터 사드 배치에 찬성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전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안철수에게 추격당하기 시작한 문재인마저도 ‘안보’ 코드에 자신의 입장을 맞추어 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그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그가 “북한이 핵 도발을 계속하면 사드 배치를 강행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의 대북 도발이라고 할 수 있는 군함 파견이 이루어지고, 더 강도 높은 대북 도발인 남한에서의 미국 핵무기 재배치까지 언급되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는 해결될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면 문재인도 사실상 사드 배치에 찬성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의 군사 위협 분위기 조성은 결국 중국이 아닌 한국까지 견제한 셈이다. 상당수 유권자들의 ‘안보심리’를 자극하여 가장 유망한 대선 후보 두 명에게 안보 보수주의 경쟁을 시킨 것이다. 이제 한때 ‘좌파’로 지목됐던 문재인은 “김정은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통령,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남북간 대화 가능성까지 희생시키면서 미국에 충성서약을 한다. 결국 그가 이렇게 해서 견제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군함외교는 제국주의의 동의어다. 일제의 조선 침략도 1875년 군함인 운요호(운양호) 침입으로 시작됐다. 그때부터 142년이나 지났지만, 군함을 앞세운 외세의 한반도 내정 개입은 계속되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지금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이 인구에 회자되지만, 사실 시리아에 대한 미사일 공격부터 핵 항공모함 파견까지의 여러 행동으로 한반도 ‘안보 바람’을 불게 만든 미국의 행동이야말로 결과적으로 한국 대선에 개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데 ‘북한 위협’의 유령을 이용하면서 한국을 영구적으로 그 손아귀에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국 당국자들의 망상일 뿐이다. 결국 사드 같은, 한국인에게 해만 되는 미국의 불장난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미국과 거리를 두고 지역안보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유도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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