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회학 연구자 기이한 장면이었다. 강간모의 공범이 “동성애에 찬성하느냐”는 질문을 다른 후보에게 던지고, 이 강간모의 공범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대하죠”라고 답하는 대선후보 텔레비전 토론. 이 한 장면이 성정치의 지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여성 ‘문제’나 성소수자 ‘문제’라 불리는 이 ‘문제’들은 그 명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성이 아니고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바라보는 문제다. 특히 홍준표 후보의 얼굴은 이 사회 기득권의 초상이다. 혐오의 공식화는 ‘그래도 된다’는 의식을 정당화하며 슬금슬금 일상에 스며든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피곤한데, 정치인이 앞서서 속마음을 대신 말해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사람들이 많다. 특히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진정성을 떠나 정치적 언어라도 제대로 구사하기를 원한다. 페미니즘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는 일을 그 자체로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위선도 자꾸 연습하면 어느새 태도가 몸에 배어 결국 그 사람이 된다. 그러나 최소한의 위선조차 연습하지 않은 채 페미니스트 선언만 할 때, 이 체화되지 않은 교양은 때로 독이 든 사과의 역할을 한다. 상대를 속인다는 뜻이다. 나쁜 정치는 항상 공동의 적을 만든다. 종교가 이단을 발명하여 교리를 지키려 했듯이, 정치는 허구의 적을 만들어 다수를 집결시킨다. ‘종북’ 장사가 이제 시원치 않은 모양이다. 성소수자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성소수자는 직장을 잃을 확률, 노숙을 할 확률이 더 높고 성소수자의 자살 충동은 이성애자의 10배에 달한다. 청소년의 경우는 45.7%가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나중’을 말하면 이는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의 소수자 묵살이다. 군대는 남성 군인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여성을 동원하여 ‘위안’이라는 이름의 매매와 폭력을 권장하는 한편 남성간의 성애는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명목으로 색출한다. (동)성애가 제한되지만 (이성)성폭력에는 관대한 ‘강간의 왕국’에서 안보란 허구다. 돼지흥분제로 젊은 시절 강간모의에 가담한 ‘꿈꾸는 로맨티스트’ 홍준표 후보는 군대 내 성‘폭력’보다 동‘성애’를 더 문제로 여긴다. 여성 군인 대상의 성폭력 가해자 중에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은 8.5%라고 한다. 군대 밖의 성폭력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흉악범을 사형시키지 않아서 범죄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정작 성범죄에 대한 헐거운 양형에는 왜 침묵할까. 우리 사회는 성인 동성 간의 성애보다 미성년 여성에 대한 성인 남성의 성폭행을 더 ‘인간적으로’ 여긴다. 미성년자 성폭행범도 열 명 중 네 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손녀 같아서” 캐디를 성추행했다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16년 동안 의붓딸을 성추행한 남성은 “의붓딸을 상대로 한 것으로 불특정 3자에게 다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고작 징역 3년을 받고 전자발찌도 부착하지 않는다. 최근 본 뉴스들만 떠올려도 이 지경이다. 얼마 전 한국의 요양원에서 일하던 분을 만났는데 요양보호사들이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많은 곳을 선호한다며 “어떤 할아버지들은 기저귀 갈아줄 때 자꾸 보호사들 엉덩이를 만지고 이상한 짓을 해요”라고 한다. “안 끝나요. 여든이 넘어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와중에도 그런 짓을 해요. 죽어야 끝나.” 최소한 사람과 돼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선후보는 물론이고 정치를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게 돼지도 살고 사람도 사는 길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