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뉴스팀장 ‘절멸(annihilation) 작전’이라고 했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최근 이슬람국가(IS) 퇴치전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니힐리즘(nihilism)과 말뿌리가 이어진 이 단어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앤다는 뜻이다. 격퇴·퇴치·분쇄 같은 말과는 급이 다르다. 유대인 문제를 ‘최종 해결’한다던 히틀러의 맹세처럼 묵시록적 느낌을 풍긴다. 9·11테러 뒤 조지 부시가 ‘악의 축’(axis of evil)이란 창조적 조어법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조장한 바 있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위급 군 지휘자가 이런 말을 대놓고 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인간이라는 유적 존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계속 시험하는 이슬람국가의 행위는 통상적 대응과 비난으로 감당이 어렵다. 이슬람국가는 13일 필리핀에서 그 추종 세력이 기독교인들을 총살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는데, 그동안 보여준 방식보다 덜 잔혹하다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아야 할 지경이다. 증오의 심연은 ‘절멸’ 같은 지독한 말과 행동을 뿜어낸다. 13세기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이탈리아 콜론나 가문의 영지 팔레스트리나에 풀 한 포기 못 자라게 소금을 뿌린 것처럼, 17세기 청의 강희제가 이미 화장한 중가르제국 지배자 갈단의 유해를 베이징에서 다시 빻아 뿌린 것처럼…. 그런 절멸은 가능한가? 중동에서의 포위전은 언젠가 가시적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 측면에서 그럴 뿐, 진정한 절멸은 호락호락한 과제가 아니다. 모험주의와 맹신, 맹동주의로 무장한 이슬람국가 쪽은 차원이 다른 자들이다. 적을 쓰러뜨려 내가 살려는 게 전투인데, 이들은 죽어도 좋다는 식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순교의 열정의 급속한 확산이다. 2001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순교자들’에게는 거창하고 찬연한 목표 추구가 있었다. 지금은 ‘아무나’ 순교의 꿈을 이룰 수 있다. 자살폭탄을 터뜨리기 15분 전에 엄마와 동생한테 전화해 “미안하다”고 하고(영국 맨체스터 테러범), 차로 들이받고 흉기를 휘두르기 직전에 20개월 된 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런던브리지 테러범), 두 주밖에 안 된 아기를 집에 남겨두고(런던브리지의 다른 테러범) 하는 게 테러가 됐다. 유럽 시민들은 이웃 꼬마에게 사탕을 나눠주던 동네 주민이 어느 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평행우주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여길 법도 하다. 공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복을 위한 이해가 필요하다. 옛날 얘기이긴 하나, 로마시대에는 기독교도들의 순교의 열정이 지나쳐 나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살해할 테니 제발 죽여달라고 협박까지 할 정도였다. 지금도 아랍세계 사람들이 원한과 복수의 근거로 꼽는 십자군전쟁은 속죄와 천국행이라는 교황의 약속에 200년 가까이 이어지며 중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전투적 순교자들에게 이교도의 목숨은 천국행 티켓의 교환물이다. ‘21세기에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계몽은 계몽된 사람만 이해하는 개념이다. 미국한테 이슬람국가 및 순교의 열정은 지난 세기의 소련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라이벌인지 모른다. 유물론자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생산력 열세로 물질적 패배가 입증되자 항복했다. 이번에는 표적이 안 보이는 거대한 정신세계와의 싸움이다. 입증될 수도, 반대증거로 탄핵할 수도 없는 존재를 굳게 믿는 이들의 사악한 결의를 분쇄할 무기는 뭔가? 사태가 매우 간단치 않음을 인정한다면, 서구는 자신들이 지옥문을 여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도 성찰해야 한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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