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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대통령 옆 ‘수어통역사’ / 김철환

등록 2017-06-19 19:47수정 2017-06-19 20:10

김철환
장애인정보문화누리 활동가

몇 년 전 이야기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추도식에서 엉터리 수어(수화언어)통역이 문제가 됐다. 당시 기사를 접하고 수어통역사에 대한 허술한 검증을 조금 의아해했다. 하지만 이보다 생생한 기억은 수어통역사의 자리였다. 각국 정상이 참석한 자리에서, 당시 연설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 옆에 수어통역사가 배치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각종 국가기념일에 방송을 통한 수어통역은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기념일 행사장에서 수어통역사를 보기는 힘들다. 간혹 배치되는 경우가 있지만, 단상에서 멀찍이 떨어진 귀퉁이에 수어통역사를 둔다.

인간에게 귀천이 없듯 언어에도 귀천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교과서적인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더 나아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청각장애인(농인)들이 사용하는 수어다.

국제적으로 수어를 100년 넘게 교육현장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아픈 역사가 있다. 이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수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 농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을 받았다. 가정에서 수어를 배우는 것은 엄두조차 못 냈으며, 밖에서 배운 수어를 사용하면 부모에게 야단을 맞기도 하였다. 결국 의사소통의 제약으로 부모나 형제자매와 단절되어 산 이들이 많다.

학교에서도 수어를 잘하는 교사가 드물었고, 제대로 된 수업을 받기 어려웠다. 일상에서도 수어통역 서비스 부족으로 비장애인으로부터 배제를 당했다. 취업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으며, 마음에 드는 직장에 들어가도 승진이 안 되는 등 불이익을 받았다.

농인들의 노력으로 지난해 ‘한국수화언어법’(수어법)이 만들어졌다. 이제 한국에서도 수어가 언어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수어 정책도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제공된 수어통역으로 인지도도 올라가고 있다. 많은 농인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농인에 대한 차별이 남은 것처럼, 수어도 일반 언어로 충분한 대접을 못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선서식에서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그간 문 대통령의 행보는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농아인들에게 아직은 머나먼 이야기다. 대통령에게 우리와도 눈을 맞추어 달라고 요청하고 싶지만 언어적인 벽으로 그러지 못하고 있다.

외국은 주요 장관 등이 기자회견을 할 때 그 옆에 수어통역사가 서 있는 경우가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총리나 관료가 기자회견이나 브리핑을 할 때, 옆에 서 있는 수어통역사를 가끔 볼 수 있다. 기자회견장에 농인이 없을 때도 통역을 하는 이유는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의 존재를 국민에게 일깨워주려는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기자회견장이나 국가 행사장에서 대통령 옆에 수어통역사를 세웠으면 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긴 세월 남 몰래 흘려온 농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 차별의 상처를 안고 살았던 농인을 힘내라고 껴안아 줄 수 있다. 대통령의 이런 행동으로 정부가 추진하는 수어 정책이 힘을 받고, 국민인식 개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수어법에 명시된 한국 내 공용어인 수어를 대통령이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증거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 옆에서 통역하는 수어통역사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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